광장은 무료다, '탑승권'도 필요없다

2016. 11. 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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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치BAR_김도훈의 낯선 정치

11월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14년의 가장 끝내주는 순간은 12월 서울시청에서 벌어졌다. 박원순 시장은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에 대한 합의 실패를 이유로, 선포 예정이던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를 중지했다. 일부 극렬 기독교계의 압박 때문이었다. 서울시가 인권헌장 폐기를 발표한 다음 날, 박원순은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목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동성애는 확실히 지지하지 않는다.” 그게 불에 기름을 얹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서울시청 1층 로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서울시는 퇴거하라고 명령했다. 성소수자들은 그럴 생각 없었다.

더 근사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대개 이런 집회에는 인권단체, 혹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만이 자리를 채우게 마련이다. 그날은 달랐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소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던 시민들도 서울시청으로 향했다. 겨울의 새벽이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젊은 성소수자들이 하나둘씩 시청으로 향한다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쪽수의 힘!

이건 일종의 사담인데,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는 간혹 ‘종로파’, ‘이태원파’라는 표현이 사용될 때가 있다. 여기서 ‘이태원파’는 ‘평소 인권 활동에는 무관심하면서 주말에만 이태원 게이 클럽에서 놀고 주중에는 정체를 감추고 사회로 돌아가는 성소수자들’을 의미하는 (혹은 은밀하게 하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표현은 인권 활동가들도 드물게 사용한다. 그날 서울시청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이를테면 이태원파들도 많았다. 무언가가 그들 마음 속의 심지에 마침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결국 박원순 시장의 입을 통해 공식 선포되지는 못했다. 인권헌장 제정에 참여한 인권단체가 스스로 이 헌장을 선포해야만 했다. 어쩌면 그건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흩어진 채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성소수자들이 서울시청을 점거하고 집회를 벌이는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서 결합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던 세력의 ‘가시화'였다. 가시화는 중요하다. 활동가가 아닌 사람들이 일시적으로라도 활동에 가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들 알다시피, 결국 무언가를 진짜로 움직이는 힘은 숫자에서 나온다.

얼마전 소셜미디어에서는 광화문광장 ‘박근혜 탄핵 집회’에 대한 무임승차 논란이 있었다. 지금까지 별다른 분노없이 살다가 박근혜 정권에 배신을 느끼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을 견제하고 겨냥하는 의견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로서는 무임승차와 유임승차를 가르는 경계가 대체 무언가 싶다. 물론이다. 광장은 오랫동안 저항해온 ‘활동가'들이 가장 먼저 열었을 것이다. 그들이 첫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광장을 채우는 것, 정부가 정말로 두려워 할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로 채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처음부터 ‘유임승차자’는 없었다는 사실

광장에는 정말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아무런 분노없이 살다가 욱해서 나온 사람들이 있다. 제 손으로 박근혜를 뽑고 지지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뛰어나온 사람들이 있다. 민주노총은 거북하지만 어쨌든 나라 꼴이 말이 안된다며 나온 사람들이 있다. 과격 시위는 싫지만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시위가 좋아서 나온 사람들도 있다. 꽃벽이 좋은 사람들이 있고 꽃벽이 싫은 사람들도 있다. 박근혜는 내려와야 하지만 다음 정권은 여전히 새누리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광화문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의 집결된 목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 광화문은 거대한 무임승차자들의 광장이다.

무임승차에 유독 불쾌해하는 사람들 중에는 87년 6월 항쟁을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들이 많은 듯도 하다. 그런데 시대를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보자. 87년의 광장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유임승차자들이었나? 그럴 리가. 교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광장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전두환 시대의 경제적 버블에 몸을 맡기고 안전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어나오고야만 수많은 무임승차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가세 없이 6월 항쟁은 완성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광화문에도 더 많은 무임승차자들이 나와야 한다. 더 많은 정치가와 예술가와 학자와 시민들이 시류에 무임승차해야 한다. 이것은 무임승차고 저것은 유임승차라고 따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마음껏 승차할 수 없다. 처음 광장에 나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죄책감이나 부채의식을 건드려야 할 이유를 애써 찾지 말자. 광장에 탑승권은 필요 없다. 광장은 무료다.

김도훈은 온라인 미디어 허프포스트의 한국판 편집장이다. 그는 하드뉴스는 소프트뉴스를 더 존경해야하고, 소프트뉴스는 하드뉴스를 더 경의해야한다고 믿는다. 종종 이 칼럼은 고양이가 대신 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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