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성역 뚫고, 시위 역사 새로쓴 '평화촛불'
[머니투데이 윤준호 기자, 김평화 기자, 김민중 기자] ['대통령 퇴진' 시위대, 청와대 200m까지 진출 '포위행진'…시민의식, 권리를 되찾다]
금기가 풀렸다. '청와대 부근'이란 성역이 뚫렸다.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이 오랜 족쇄를 끊고 광장과 거리를 되찾아왔다.
26일 5차 주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청와대 200m 근처까지 행진했다. 다른 주장도 아니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청와대를 포위하듯 행진하려는데 법원이 허용했고 경찰이 탄력적으로 대응했다.
행진에 나선 시민들은 평화적으로 분노를 절제하며 이성을 놓지 않았다. 연인원 150만명(주최측 추산)이 몰린 반정권 시위였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현행법상 청와대 100m 이내에서 집회와 시위는 금지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1㎞ 이내로 시위대가 들어가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대규모 시위라면 더더욱 그렇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로터리(청와대 1㎞ 이내에 위치)까지 뚫리면 서울 종로경찰서장과 서울지방경찰청 경비부장(경무관) 등 관련 책임자들은 옷을 벗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청와대 가까이에 시위대를 들여놓는 일은 대통령에 대한 불경이자 위험이었다.
그러나 한 달째 이어지고 있는 기적의 평화 촛불 행진이 관행과 구습을 깨버렸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시민들은 격분했지만 질서를 잃지 않았다. 몇몇 돌발행동이 발생해도 이내 평화시위 외침에 제압당했다. 시민들은 차벽(경찰버스)에 꽃을 붙이고 쓰레기를 주웠다.
한 경찰 간부는 26일 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목길에서 버려진 손팻말 등 쓰레기를 줍는 시민들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평화로워도 외침은 엄중했고 메시지는 강력했다. 자녀와, 연인과, 친구들과 손잡고 나가 노래하고 외치는데 제동을 걸 명분도 없다. 법원은 19일에 이어 26일에도 청와대 200m까지 행진 경로를 허용했다.
주최 측인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시간이 맞지 않았던 지난 주와 달리 행진 시간대를 맞춰 26일에는 오후 4시부터 '청와대 인간 띠 잇기'라는 이름으로 청와대 포위행진을 실시했다. 대규모 행진으로는 사실상 처음이다.
시위대는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세움 아트스페이스 앞 △새마을금고 광화문지점 등 4개 방면으로 나뉘어 걸었다.
시위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기념비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느라 분주한 모습도 보였다. 수십만 포위행진이 뱉은 구호와 함성은 경복궁 성곽에 부딪혀 일대에 울려퍼졌다. 주변 건물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던 주민들은 박수 치거나 손을 흔들며 응원했다. 뚝 떨어진 기온에도 다들 활력이 넘쳤다.
6살 아들과 함께 나온 엄마 손영은씨(35)는 "청와대 행진을 법원이 허용했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민심이 대통령을 이겼다"며 "역사적인 순간을 아들과 함께 하고자 추운 날씨에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달부터 한번도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대학생 양은수씨(21·여)는 "한달 만에 드디어 청와대 코앞까지 행진한다"며 "어렵게 찾아온 기회인 만큼 목청껏 청와대를 향해 퇴진을 외치겠다"고 말했다.
경복궁 외곽으로 접어드는 좁은 길목에서 한꺼번에 많은 인파가 몰려 병목현상도 나타났지만 인상 찌푸리거나 서두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열 흐름에 따라 질서 있게 행진했다.
법원이 행진 허용 시간으로 제한한 오후 5시30분이 지나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한때 경찰과 마찰도 빚었지만 큰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경찰도 진압이나 연행보다는 합법 시위를 유도하는 대응을 했다.
이날 집회는 밤 11시 대부분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모이면서 마무리 수순을 밟았다. 남은 시민들은 오전 1시까지 문화제를 열고 일부 참가자들은 자발적으로 1박2일 철야집회를 진행했다.
윤준호 기자 hiho@, 김평화 기자 peace@, 김민중 기자 mi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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