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골찬 콘텐츠만 담았죠, 겉멋 뺀 4700원짜리 책"

조태성 2016. 11. 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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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클릿 프로젝트' 권현준 위고웍스 편집장
권현준 위고웍스 편집장이 23일 서울 공덕동 사무실에서 '4,700원'짜리 '위고웍스 부클릿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bwh3140@hankookilbo.com

갱지 표지에 길어야 100쪽

사진ㆍ그림 없이 글씨만 빼곡

갱지 표지에 70쪽 남짓에서 길어봤자 100쪽 정도인 두께. 200자 원고지 250매, A4용지로 치면 20매 분량이다. 게다가 서지사항은 책 표지에 붙은 스티커 한 장에 바코드와 함께 다 들어가 있다. 언뜻 봐서는 초중고생이 편히 쓸 수 있는 간단한 메모장 같은 느낌이다. 표지를 열어보면 사진이나 그림 같은 요소들은 단 하나도 없이 충분한 여백 아래 글씨만 빼곡하다. 책의 가격도 4,700원. 커피 한잔 값이다.

이 책을 낸 주인공은 권현준 위고웍스 편집장. “커피 한 잔 마실 시간과 돈이면 충분히 다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실제 목표다. 권 편집장은 23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출판을 두고 가장 기본적인 콘텐츠 산업이라고 하는데, 그 콘텐츠로만 승부를 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콘텐츠 산업이라는 출판

유명 저자ㆍ섹시한 제목…

내용물보다 겉모습만 강조

쓱 집어 봐도 좋은 책 목표”

출판 위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답답했던 건 위기 자체가 아니라, 모두가 위기라 하는데 그에 합당한 실험이 보이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책의 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표지를 고급화하고 디자인에 공을 들입니다. 널리 알려진 유명 저자를 잡기 위해 선인세 경쟁을 벌입니다. ‘섹시한’ 제목을 뽑기 위한 제목 짓는데도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콘텐츠 그 자체는 외주에만 의지합니다. 이게 콘텐츠 산업이라는 출판에 걸맞는 방식일까요?” 독자들 사이에서 ‘그럴 듯 해 보여 샀는데 막상 별 다른 내용이 없다’는, ‘도서정가제로 책만 비싸졌다’는 불만이 나도는 이유라고 봤다.

중형 규모의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그는 고민 끝에 올해 친구가 운영하던 조그만 무역회사 ‘위고웍스’에다 출판업을 추가하고 그리 자리를 옮겼다. 그 첫 작품이 이번에 한꺼번에 4권의 책을 내놓게 된 ‘위고웍스 부클릿 프로젝트’다.

그래서 제작 방식도 다르다. ‘우리는 왜 구글에 돈을 벌어다 주기만 할까’의 경우 기존 저자라 할 수 있는 안현효 대구대 교수의 책이다. 예전 같으면 쉽게 풀어 써달라 한 뒤 교정ㆍ교열을 보고 책을 냈을 터인데, 이 책은 그리 하지 않았다. 권 편집장이 안 교수의 논문 3, 4편을 일독한 뒤 안 교수를 인터뷰했고, 그 내용을 토대로 책을 썼다.

‘왜 거울 없이 메이크업을 하는 거죠’ ‘당신의 기부금은 잘 쓰이고 있습니까’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두 책은 샤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류성우씨, 사회공헌과 소액기부 전문가 김종빈씨와 함께 썼다. ‘함께 썼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들은 책을 써본 적이 없기에 권 편집장이 그들을 수 차례 인터뷰하고 이를 정리한 뒤 다시 당사자들과 협의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실상 ‘공저’가 아닐까. “저자가 따로 있고 편집자는 교정ㆍ교열을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아니라 ‘콘텐츠 공급자’, 교정ㆍ교열이 아니라 ‘콘텐츠 가공자’ 개념을 쓰고 싶었어요.” 실제 서지사항을 보면 안현효ㆍ류성우ㆍ김종빈의 이름은 ‘저자’ 대신 ‘콘텐츠’라 표기됐다. 검증된 저자 외에 새로운 저자를 발굴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도 들어 있다.

나머지 한 권은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의 노벨상 수상 연설 ‘세계 발전에서의 평등 문제’(The Equality Issue In World Development)가 해설과 함께 영어 원문 그대로 실렸다. 권 편집장은 “2차대전 이전 고전에 비해 그 이후 ‘고전’이라 불릴만한 책들은 우리에게 소개가 되어 있지 않다”면서 “그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글들을 영어 원문 그대로 꾸준히 소개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웨덴식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뮈르달 이름도 심심찮게 거론되지만, 뮈르달의 텍스트 자체는 잘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했다.

이 모든 작업의 목적은 ‘몇만원 들여 책 사놨더니 다 읽지도 못한 채 내버려둬서 아깝다’는 기분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쓱 집어다 읽어봤더니 꽤 괜찮더라’는 느낌을 선사하는 데 있다. 판매 방식도 신문 가판대 같은 느낌으로 접근해볼까 생각 중이다. 갱지에다 얇은 두께의 책이다 보니 아무래도 서점 진열만 고집해서는 판매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했다. 북카페, 동네책방 같은 곳을 뚫어볼 생각이다.

‘조금 더 쉽게 읽고 버려도 되는 책’ 개념 자체가 신선한 접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근엄함’이 남아 있는 우리 문화에서 쉽지 않은 접근이기도 하다. “책 읽기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옹골찬 콘텐츠를 담아보자는 건데, 저로서도 위험한 실험이에요. 결과야 뭐, 지켜봐야겠죠.”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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