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충분히 불복종하고 있는가

홍명교 오늘보다 편집위원 2016. 11. 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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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칼럼] 경찰 차벽에 붙은 스티커를 떼는 착한 시민들, 탱크의 질주를 멈출 수 있는가?

[미디어오늘 홍명교 오늘보다 편집위원] 팔레스타인의 어린 소년이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사진을 본 적 있다. 그것은 골리앗에 맞선 다윗이었고, 알 수 없는 연대 의식마저 느껴졌다.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느 영화에서처럼 저항군 활동을 하는 가족이 이스라엘군의 총알에 쓰러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탱크의 기수가 소년의 초콜릿을 훔치기라도 했나?

2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수백 년 간 살던 땅을 시오니스트들에게 내줘야 했다. 그것은 강탈이었고, 거대한 폭력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향에서 쫓겨났고, 70년 간 삶의 터전 대부분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진 구역 경계엔 거대한 장벽이 세워졌다. 마치 청와대로 향하는 길에 세워진 거대하고 긴 경찰 차벽처럼, 투표일에만 주권이 허락된 우리처럼 말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누구도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을 꾸짖지 않는다. “폭력 시위”라고 나무라지도 않고, “저 탱크에겐 아무 죄가 없어. 그저 이스라엘 총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라며 방향 없는 낭만을 부르짖지도 않는다.

▲ 2000년 10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카르니 국경검문소에서 팔레스타인의 13살 소년이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토요일 밤 거리는 다시 뜨거웠다. 전국 주요 도심에 10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청와대와 친박 세력의 어깃장에도 시민들은 멈출 생각이 없다. 계속해서 자신의 싸움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이 느껴졌다.

폭력-비폭력이라는 부당대립

이날 서울에선 다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경찰버스에 ‘꽃’ 스티커를 부착한 것을 떼어버린 일군의 시민들이 나타난 것이다. 시민들은 ‘결국 불쌍한 경찰들이 이거 떼느라 고생하지 않겠냐’며 사랑이 가득한 실천을 선보였다. 1968년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대에게 향한 경찰의 총구에 꽃을 선사했던 것을 모티브 삼은 퍼포먼스조차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질서라니. 언론이 추앙하는 것처럼 우리의 퇴진 투쟁은 성숙하고 선진적인가.

불행히도 폭력-비폭력 논쟁의 대립은 우리가 진정으로 대면해야 하는 질문을 퇴색시킨다. ‘폭력 시위를 해야 한다’도, ‘비폭력 시위를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국면을 해결할 열쇠는 아니다. 분노한 시민들이 조선일보 각본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판세를 엎는 주연이 되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불복종하고 있는가?

잘못된 체제에 대한 저항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역사를 바꾼 민중의 저항은 언제나 ‘불복종할 권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3·1운동 시기 ‘폭력 시위’를 우려하고 평화로운 시위를 강요한 이가 누구였는가.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이었다. 이미 1960년 3월부터 거리를 장악하고 관공서를 향해 폭력 시위까지 벌이며 4·19혁명을 이끈 이들이 누구였는가. 대학생들의 심각한 소극성을 규탄한 청소년들이었다.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헌법 전문 구절도 이를 보증한다. ‘우리가 주권자다!’라는 구호가 일관성 있고 효력 있는 외침이 되려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실행해야 마땅하다.

▲ 4·19혁명 당시 대학생들의 운동 모습
변하고, 멈추고, 넘어서야

시민들은 박근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잘못됐다는 걸 안다. 보수세력의 우려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잘못된 체제를 ‘어떻게 바꾸냐’가 문제다. 그러니 마지막 변수는 바로 분노한 시민들이다. 야당이 무능하고, 검찰을 신뢰할 수 없다면 시민 저항만이 희망이다.

이제 문제는 분노한 시민들의 길을 만들고 행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삶이 굴종이었다면, 우리 입을 틀어막고 복종하게 한 잘못된 세상은 행동으로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니 문제는 폭력-비폭력의 대립에 있지 않다.

우리는 충분히 불복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주말 저녁 광화문에 나가 분노를 숫자로 보여줬을 뿐이다. 차벽 앞에서 멈췄고, 평일에는 일상이 이어졌다. 4주가 지났다. 이제 우리의 시위도 변해야 한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생활과 일터 곳곳에서 시민 불복종을 확대하자. 퇴근 길 동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는 것, 도심으로 나가 깃발을 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일터의 주권자로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아파트 베란다에 ‘퇴진’ 깃발 걸기 등 방법도 무궁무진하다.

둘째, 우리는 멈추어야 한다. 싸움은 상대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어떤 사회든 자본주의 시스템의 권력자들은 1시간이 됐든 하루가 됐든, 일주일이 됐든 사회가 정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일터를 멈추고, 학교를 멈추고, 거리를 멈추어야 비로소 ‘헌법 1조’가 됐든 뭐가 됐든 평범한 사람들의 위용이 확인된다. 시민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 때다.


셋째, 우리는 넘어서야 한다. 무엇보다 조선일보식 가이드라인을 넘자. 조선일보는 박근혜를 만든 체제의 주범이었고, 지난 4년 내내 박근혜 정권의 정책들을 칭송해마지 않았다. 헌데 갑자기 박근혜를 향해 총구를 돌려 ‘내려와’라고 말하고 있다. 보수세력의 내분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시민들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이름만 바꾼 똑같은 체제를 원치 않는다면 조선일보가 짠 각본을 거부해야 한다. 그들의 말을 예의주시하고, 분노한 시민들의 각본을 짤 때다. 우리를 옥죄고 공포를 내면화해온 굴종사회의 굴레를 넘어설 때다.

끈질긴 불복종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진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저항은 옳다. 하지만 돌멩이 몇 개 쯤 던진다 해도 탱크는 별 무리 없이 전진할 것이다. 오랜 세월 대대로 머무르던 소년의 집을 부수고야 말 것이다. 헌데 이스라엘 정부는 매년 1천 명의 소년들을 돌멩이를 던진 혐의로 체포해 왔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저항은 이스라엘 정부를 두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한국은 실업, 자살율, 가계부채, 부익부빈익빈, 재벌에 의한 노동 착취 등 삶을 뭉개는 거대한 탱크들의 질서로 만들어진 사회다. 우리 곁의 사람들을 짓밟아온 탱크의 주인만 바꾸면 되는가, 아니면 탱크들의 질서를 무너뜨려야 하는가. 팔레스타인 소년이 옳았던 것처럼, 당연히 ‘탱크의 질주’를 멈추는 것이 옳다.

▲ 11월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과 세종로 일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사진=포커스뉴스
폭력이든 비폭력이든 질서에 대한 ‘순응’은 어떤 권력자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위협적이지 않는 저항은 무시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조급하고 단발마적 저항도 하룻밤 소란에 그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실천은 ‘끈질기고 지구력 있는 불복종의 연쇄’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급증을 거두고, 다른 한편으론 ‘행동’에 대한 정치적 결벽증을 떨쳐야 한다. 권력자들이 태도를 바꾸는 만큼 시민의 저항에도 변화가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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