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오디세이]시인을 위한 물리학

김소영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 대학원 교수 2016. 11. 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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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캠벨 수프 캔을 나란히 늘어놓은 그림으로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스스로를 ‘심오하게 피상적인’(deeply superficial)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그가 죽기 일년 전 제작한 자화상에 딸려 있는 표현이다. 이 자화상은 워홀 사진 네 장을 실크스크린으로 겹쳐 인쇄해 평면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3D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해석에 따라 ‘deeply’는 그냥 ‘매우’처럼 다음에 오는 형용사를 단순히 강조하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깊이와 표면을 각각 다른 품사로 표현하여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나는 이 표현이 이공계중심대학에서 인문사회 교양교육이 갖는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올해 시작된 ‘제3차 과학기술인재 육성·지원 기본계획(2016~2020)’은 세부 추진과제 중 하나로 과학기술계 학생의 기초소양 교육 강화를 제시하고 있다. 학교의 영문명칭이 ST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스트(ST)대학’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공계중심대학의 공식 명칭은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이다. 카이스트, 포항공대, 광주과학기술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울산과학기술원 등이다. 이 학교들은 상호학점인정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인문사회 교양과목 교류가 가장 활발하다.

이공계에 특화된 대학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과가 따로 없기 때문에 스트대학 학생들은 오로지 교양과목을 통해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접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인문사회과학 분야 교수들은 각자 자기가 전공한 학문 분야의 대표 선수가 되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어떨 때는 자기 학문만이 아니라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 전체의 대표 선수가 될 때도 있다. 종합대학이라면 예컨대 정치학 분야 과목이 수십 개 개설돼 수업을 듣지 않더라도 개설과목 리스트만 봐도 정치학이라는 분야가 학문으로서 나름 상당한 체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현재 재직 중인 대학원이 설립되기 전 한동안 교양과목으로 정치학을 가르쳤는데 나 역시 대표 선수로서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 지금 돌아보면 두 가지 노선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공계 학생들이 거의 평생 단 한번 정치학을 들을 기회인 만큼 정치학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신념에서 정치학과 고학년 전공과목만큼 강도높게 가르쳤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무슨 교양과목을 전공과목처럼 가르치느냐고 불평이 컸다.

사실 이공계 학생들이 구체적인 정치학 이론과 체계, 개념을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느 순간 첫번째 노선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학을 통해서 보다 일반적인 사회 체제와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학 영역의 이론이나 사례보다는 이공계 학생들이 매일 접하는 과학기술 분야 현상과 연관시켜 강의를 진행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정치학이 별게 아니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 사실 정치학 이론과 개념 정립은 과학기술 분야 학문 못지않게 엄정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지는데 강의를 쉽게 하다보니 정치학을 신문 만평 수준으로 오해하는 위험이 생긴 것이다.

결국 이 고민은 이공계중심대학에서 어떻게 인문사회 교양교육의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담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과연 어떤 학문 분야를 전공이 아니라 교양으로 가르칠 때 ‘심오하게 피상적’일 수가 있는가?

이는 비단 인문사회 교양교육만이 아니라 비전공자에게 전공 지식을 전달할 때 맞닥뜨리는 딜레마다. 비슷한 고민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소위 <시인을 위한 물리학> 논쟁이 있다. 1970년 출판 이래 다섯 번 개정판이 나온 <시인을 위한 물리학>은 시인으로 상징되는 물리학 ‘깜깜이’들에게 어떻게 물리학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쓰인 책이다. 수많은 대학의 교양 물리학 교재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아예 몇몇 대학에서는 물리학 입문 과목 이름으로 쓰고 있다. 비전공자에게 무척 친절한 교재이나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물리학을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다보니 물리학이라는 분야가 별게 아니라는 착각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즉 물리학은 재미는 있을지라도 쉽지는 않은데 마치 ‘쉽고’ 재밌는 것처럼 전달함으로써 비전공자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미래 이공계 인재상으로 ‘T-자형 인재’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제너럴일렉트릭에서 현대조직의 인재상으로 제시한 T-자형 인재는 글자 모양 그대로 스페셜리스트로서 자기 분야 전문성의 깊이와 제너럴리스트로서 다양한 분야 교양의 넓이를 지닌 통섭형 인재인데, 참 말이 쉽다는 생각이 든다.

<김소영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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