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경의 미국 대선 리포트]'다정한 파시즘'..트럼프는 '진보'가 아니다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2016. 11. 2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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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왼쪽)가 19일(현지시간)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 있는 트럼프인터내셔널골프크럽에서 공화당 내 비판세력이던 미트 롬니를 만나 안내하고 있다. Getty Images

11월 8일 도널드 트럼프는 제일 강대국의 권좌를 차지했다. 다수의 미국인은 희망에 들떴고, 언제나 번영했던 1%는 안도했다. 또 다른 다수는 충격 속을 헤매고, 4%는 생계를 위협받으며, 1%는 린치 공포에 떤다. 1100만 불법체류자와 330만 무슬림이다. 여기에 약자로 구분되는 1%의 동성애자, 6%인 아시안, 18%를 차지하는 히스패닉, 흑인과 여성을 포함한다면, 선거결과는 가히 재앙급이다.

물론 이들 중에도 트럼프 지지세력은 있다. 하지만 거리를 가로지르는 위협, 극도의 혐오를 드러내는 사이버 ‘불링(깡패짓)’은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않고 히잡과 피부색만을 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인권단체인 남부빈민법센터(SPLC)에 신고된 증오행위만 개표 후 500건에 육박한다. 불안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은 범죄기록만으로 미등록 이민자를 추방하지 않겠다는 ‘안전도시’를 재선포했다. 하지만 이를 보도한 공영라디오방송(NPR) 페이스북에는 살기등등한 댓글 수 백 개가 올라왔다.

선거 결과가 정치적, 법적, 경제적 힘을 완비한 다음에도 ‘약자의 지형’은 유지될까. 백악관 수석 전략가로 인종주의자 스티브 배넌이 지명되고 초강경 반이민 노선을 펼칠 제프 세션스가 법무부장관에 내정됐다고 한다. 과연 미국 인구의 64%를 차지하는 백인의 실제 생활 속 우월감은 안전할까.

대선 열쇠는 러스트밸트의 분노한 백인 노동자들에게 있었다. 한국의 진보언론에는 소외된 백인 노동자들이 만든 합리적 선택이라는 과잉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부글대던 노동 대중의 불만과 분노가 변화를 선택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불쏘시개질을 한 분노가 ‘합리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수긍할 수 없다. 몇몇 진보 지식인들은 트럼프 안에 진보적 가치가 있다고도 말한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비판, 외교안보에서 미국의 실리를 우선하는 고립주의 노선이 주한미군 철수 같은 한국 내 일부 진보의 주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철저한 보수이며 극우 포퓰리스트이다. 그가 말한 미국의 이익이 노동자와 농민과 소비자의 이익인지, 세계 제일의 불평등 국가에서 나날이 부를 늘리는 상위 10%를 위한 이익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트럼프 당선 이후 가장 환호한 그룹은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삼는 에너지산업, 군수산업, 그리고 월스트리트다. 거대 제약회사들도 즉각적으로 밝은 전망을 내놓았다. 여기에 트럼프가 말한 감세 정책이 실행될 경우 최고 1%에게는 14% 넘는 혜택이 돌아간다. 당연히 최상위 수혜자 명단에 트럼프의 이름도 오를 것이다.

미국의 달러 가치를 엄호하는 힘은 군사력이다. 마이클 플린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낙점됐다. 버락 오바마의 대북 정책이 무르다고 비판해온 초강경파다. 대북압박의 강도는 달라질 것이며, 미군 철수는 방위비 추가부담을 요구할 압박용 카드로 작용할 수 있다.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닌 막말 트럼프의 ‘흔들기’일 뿐일 공산이 크다.

에너지 장관에 석유재벌 헤럴드 햄이 거론되는 데에서 보이듯, 화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긴장 국면 또한 우려를 낳는다. 세계평화를 위해 트럼프 당선이 다행이라고 외쳤던 진보학자들의 발언은 무색해지고 있다. 가장 위태로운 역행은 환경이다. 빙하가 녹고, 적도 지역 주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고, 대홍수의 위기가 지구를 목 죄어 오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기후변화를 부정한다. 파리 기후변화협약은 암초를 만났다. 세계를 위협하는 반동이다.

트럼프 승리의 진정한 주역은 누구인가. 이탈 없이 결집한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다. 선거 후 통계가 보여주듯 당내 경선에서 분열됐던 지지층은 트럼프에게 다시 모였다. 거기에 오랜 시간 정치를 외면하던 나이든 백인표가 돌아오며 외연이 확대됐다. 50:50 팽팽한 구도에서 당락을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작동했다. 이들이 경제적 이익과 진보적 가치를 만드는 발판으로 트럼프를 선택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평가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백인 중하위층은 실력 위주 경쟁질서 속에서 엘리트 중심으로 꽉 짜여졌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트럼프 선택으로 드러냈다. 대학에 굳이 안 가도 숙련된 노동자로 여유를 누렸던 20년 전과 달리 고용불안, 서비스업으로 이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루저’로 밀려난 박탈감을 표출한 것이다.

여기에 트럼프는 또다시 배신의 선택을 준비한다. 성과 위주 교육을 대표하고, 교원노조와 교수들의 집단적 반발을 샀던 미셸 리가 교육부 장관으로 거론된다. 교사들은 이제 가난한 아이들은 공부할 기회마저 놓칠 것이라며 장탄식을 한다.

선거 내내 트럼프가 재생한 것은 1980년대 레이건 시대부터 읊어대던 고전적 선동이다. 뼈대는 1960년대 닉슨이 백인 노동자를 상대로 히트친 3대 선동이다. ‘민권 운동 덕에 사람이 된 흑인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물든 여성이 남성의 권위를 깔아뭉갠다’, ‘반전 운동의 주역들은 사회주의자이며 대학을 나온 진보엘리트들로 너희를 멸시할 것이다’. 이는 트럼프에 의해 ‘흑인들에게 퍼주기를 하는 오바마케어 탓에 백인 주머니가 털렸다’,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 ‘성폭행범 라티노’, ‘테러리스트 무슬림’으로 버전업되었다. 40년 뒤면 소수인종으로 밀려날 백인들에게 트럼프는 마지막 하얀 미국의 영광을 부르짖었고, 거친 환호를 받았다.

여기에 동참한 세력은 백인만이 아니다. 베일 벗은 민낯 속에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있다. 경제적 지위에 따른 욕망이 인종과 성별을 넘어 혐오 속으로 모여들었다. 경제력을 갖춘 이민 1세대뿐 아니라 1.5세, 2세 전문직 종사자들도 끼어있다. 상시적인 구조조정 속에 정보기술(IT) 업계는 40대 경력직을 밀어낸 지 오래다. 값싼 무경력자, 인도나 중국, 남미 등지에서 온 고학력 이민자로 대체되고 있다. 의료계나, 연구직 역시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정책은 사이다처럼 향수를 자극했고, 먼저 이민 온 세대들은 트럼프를 용인했다. 한국의 러스트벨트가 박정희 신화를 불러냈듯, 미국의 선택은 특정 집단을 배제하자는 ‘뺄셈 정치’를 통한 난파선 구하기였다.

노암 촘스키는 지난 14일 선거 결과를 분석하며 ‘다정한 파시즘’이라는 말을 썼다. 오래도록 끓고 있던 분노와 두려움을 ‘솔직함’으로 폭발시키고, 그 열기에 약자를 제물로 던져버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탄생. 욕망은 논리적이지 않기에, 세계 곳곳의 분노는 극우 정당들에게 손을 내주고 있다.

우리의 광장은 뜨겁다. 백만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순간 각자의 희망에 따라 분열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광장에서 거둬내야 할 우리의 승리는 악을 제거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악을 무너뜨리고 세워낼 정의의 조각을 맞춰내야 한다. 각자 꿈꾸는 나라의 세세한 모양을 눈 맞추고 나누며 서로에게 스며들어, 함께 살 이 땅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더이상 광장의 언어가 정치의 언어에 죽어가는 치욕을 허락할 수는 없다.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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