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목사를 모시지 마세요, 써먹고 부려주세요"

송혜진 기자 입력 2016. 11. 19. 03:03 수정 2016. 12. 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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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기자의 느낌] '개구쟁이 시골목사' 김선주의 이웃과 함께 사는 법

지난 15일 충북 영동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물한계곡으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때를 영 잘못 맞추셨네. 거긴 한여름에나 가는 곳이어유."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그곳 교회를 찾아간다"고 했더니 그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교회는 지천인디유."

틀린 말도 아니다. 교회처럼 흔한 것이 또 있을까. 한데 물한계곡교회(기독교 대한감리회) 김선주(50) 목사는 좀 유별나다. 올봄 그는 이런 내용의 전단지를 마을 노인들에게 돌렸다. '이럴 때 전화하세요'라는 제목의 전단지는 이런 글로 시작했다. '보일러가 고장 나면 전화합니다' '무거운 것 들거나 힘쓸 일 있으면 전화합니다'…. 웃음은 맨 마지막에서 터진다. '경로당에서 고스톱 칠 때 짝 안 맞으면 전화합니다'.

노인들과 고스톱 쳐 드리겠다는 목사님이 최근 책을 한 권 냈다. '우리들의 작은 천국'(CBS북스 刊)이다. 목사가 쓴 책이라는데 한 권 다 읽도록 자기네 교회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눈 오는 날 동네 아이들 불러서 비료 포대 깔고 앉아 눈썰매 탄 이야기, 비바람 부는 날 김부돌 할머니네 TV 수신기 고치느라 용쓴 이야기, 힘들게 보일러 고쳐 드렸더니 연탄 한 장 깼다고 핀잔 주는 할머니에게 아주 슬쩍 맘 상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만 있다. 전래동화처럼 한달음에 읽히면서도 갓 쪄낸 감자떡처럼 문장이 따뜻했다.

김선주 목사를 만나려고 충북 영동에 있는 그의 교회를 찾아갔다. 산자락을 끼고 구불구불 길을 한참 돌고 나니 작은 예배당 하나가 보였다. 교회 옆 사택엔 김부돌(68), 최인자(94), 김영자(90), 이금선(87) 할머니가 모여 앉아 와글와글 귤을 까먹고 있었다. 이들은 만나자마자 "어케 여기까지 왔슈!"하면서 덜컥 손을 잡았다. 김 목사가 이들의 먹먹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서울에서 기자가 왔대요!" 제법 왁자지껄한 첫 만남이었다.

고스톱 짝 안 맞으면 전화하라는 목사

―올봄 마을에 돌렸던 전단지가 화제였죠.

"여기 분들이 자꾸 저를 목사님으로 모시려고만 해서요. 여긴 영동에서도 외진 산골 마을이거든요. 시골 노인 분들일수록 목사를 어렵게만 생각해요. 집에라도 찾아간다 하면 무릎도 안 좋으신 양반들이 하루종일 쓸고 닦고, 간식 좀 먹이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떡이니 고구마니 찌고 있고…. 그래서 유치하긴 하지만 목사를 제발 그만 좀 모시고, 부리고 써먹어 달라고 그런 글을 썼던 거죠. 전 이분들 삶에 들어가려고 여기 온 거니까요."

―효과가 있던가요.

"꽤 걸렸어요. 목사를 반듯하고 깍듯이 모셔야 한다는 여기 분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게 쉽진 않았죠. 제가 보일러나 TV도 고쳐 드리고, 연탄도 옮겨 드리고, 농번기 때 팔 걷어붙이고 일하는 걸 보면서 다들 천천히 문턱을 낮추기 시작했어요. 여기 분들에게는 노동이 곧 언어거든요. 농번기 때는 죽은 송장도 일으켜 세워 일 시켜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바빠요. 목사랍시고 뒷짐 지고 서서 '교회 나오라'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그건 시쳇말로 싸가지 없는 거죠(웃음). 밭도 매고, 비료도 나르고, 사과도 같이 따고…. 천천히 가까워졌어요. 그게 그래도 1년은 걸렸던 것 같네요."

―그럼 고스톱 짝도 정말 맞춰주십니까.

"아뇨(웃음). 제가 실제로 고스톱을 치는 건 아녜요. 다만 노인네들 뭐하고 계신지 보려고 경로당에 자주 가는데, 일손이 바쁘지 않을 땐 보통 다들 10원짜리 민화투 치고 계시거든요. 그거 하루종일 해봐야 보통 1000원 따나 그래요. 그 돈 모아서 다 같이 반찬 사 먹고 그러시는 거니까 그걸 노름이라고 할 수도 없죠. 이분들에겐 그저 소일거리, 스포츠인 거죠. 그런데도 제가 문을 벌컥 열면 다들 그렇게 화들짝 놀라고 부끄러워들 해요. 저는 목사니까요(웃음). '아이고, 죄송해유' 하면서요. 그래서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다고, 그냥 편하게 치셔도 된다고 그렇게 써놓은 거죠(웃음)."

김 목사는 2011년 1월 이곳에 왔다. 이 교회가 첫 부임지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곳 교회엔 80대 할머니 신자 딱 네 명만 있었다고 했다. 요즘은 25명쯤 된다. 30~40대 중장년층이 6명쯤 되고, 나머지는 모두 60~90대 노인들이다.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도 여는데, 요즘엔 25명 정도가 온다고 했다. 김 목사에게 "전도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전도는 안 했다"고 했다.

―전도 안 하고 어떻게 교회를 운영하죠.

"말로 안 하죠. '교회 다니라'는 말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어르신분들 집에 다니면서 짐 날라 드리고, 병원 모셔다 드리고, 차 태워다 드리고, 심부름 해 드린 게 전부예요. 시골 사람들은 빚지고는 못 살아요. 그렇게 도와드리면 제 사택에 찾아와서 현관문 앞에 푸성귀라도 두고 가요. 그렇게 자꾸 배추 두고 가고, 고구마 두고 가고, 그러다가 어느 날 예배당에서 함께 기도하게 되는 거죠. 저는 저희 교인들에게도 '다른 분들에게 전도하라'고 안 해요. 교회를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교회 밖에서도 착하게 이웃을 위하며 사는 것이고, 전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도 교회 밖에서도 선하게 사는 것이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즐거우면 그만인 거예요(웃음)."

열심히 믿는 죄

김 목사는 본래 법학도였다. 부모님은 성실했고 가난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대학을 입학한 이후로는 10년 넘게 교회에 발걸음을 끊었다고 했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아버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 문제가 보였다. 교회가 또한 그런 그늘을 키웠음을 보았다. 더는 교회를 다닐 수가 없었다."

아내 김은숙(48)씨를 만나 결혼하고 나서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새로운 회의가 싹 텄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계몽주의가 과연 인간을 구원했을까. 인간은 왜 이토록 잔혹하고 끔찍한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2009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자퇴했다. 부패한 한국 교회의 환부가 그를 괴롭혔다.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도 이때 썼다. 책에서 김선주는 한국 교회의 목사를 '영혼을 지배하는 권력자'로, 교회를 '이념의 성전'으로, 설교를 '소비되는 권위의 상징'으로, 헌금을 '윤리를 망각한 영혼의 환각'으로 규정했다. 김선주 목사는 "당시 워낙 분노에 가득 차서 썼던 탓에 문체가 거칠다"고 했다.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목사가 될 생각은 없으셨겠죠.

“그렇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니 폭탄을 던졌던 거죠.”

―그런데 목사가 됐고요.

“불가항력적 일들이 계속 생겼어요. 반복적으로 영적인 꿈을 꾼다거나 하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버티고 저항했지만 결국 신학대학원에 돌아가 졸업했죠. 그러다가 2011년 1월 이곳에 자리가 났어요. 고민하지 않고 그냥 왔어요. 일단 왔으니 뒤돌아보지 않고 제 몫의 일을 시작한 것이고요.”

김 목사의 이런 독특한 이력 때문일까. 물한계곡교회 사람들은 ‘헌금하십시오’ ‘교회에서 봉사하십시오’ ‘성경책 몇 번 읽으셨나요’ 같은 말을 김 목사에게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부돌 할머니는 “그런 말 당췌 안 하셔. 그냥 새벽이고 낮이고 밤이고 집에 찾아와서 방바닥 따순지, 테레비 잘 나오는지 살펴보고 가실 뿐이지…”라고 했다.

―‘헌금하라’는 말을 안 하는 목사님도 있네요.

“헌금하고 십일조를 내는 게 교인으로 인정받는 단계가 될 순 있겠죠. 하지만 저는 헌금 많이 내고 십일조 열심히 한다고 축복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교인들에게도 항상 얘기해요. 헌금 많이 낸다고 축복 더 받는 거 아니라고요. 저희 교회 다니는 분 중에 십일조 아주 열심히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이분 성격이 괄괄해서 잘 싸워요. 하루는 이분이 논에 물을 대는데 옆집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그 물꼬를 잠깐 자기네 논 쪽으로 돌려놨다고 멱살 잡고 몸싸움을 벌였어요. 제가 이분 붙들고 그랬어요. ‘예수 왜 믿어요?’ ‘구원받으려고 믿지’ 하세요. 그 말에 ‘십일조만 내면 구원받는 줄 아세요? 예수 믿는다는 건 예수처럼 살겠다는 뜻이에요. 교회 다닌다고 전부가 아니에요. 삼촌뻘 되는 양반과 싸우면서 구원받으실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세요’ 했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처음엔 엄청 고통스러워 하셨어요. 한 달쯤 뒤 이분 얼굴이 환해져서 나타났어요. ‘목사님, 제가 사과했어요! 어르신이 본인도 잘못했다고 그러시대요’ 하면서요(웃음).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변해가는 거죠.”

―이 교회에선 청소 봉사 같은 것도 안 시킨다죠.

“어르신들이 교회 쓸고 닦으며 고생하시는 게 일단 싫고요,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남들과 친절하게 지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교회는 저와 제 아내가 치우면 돼요. 교회에서만 열심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많은 교인이 교회에서 열심히 청소하고 봉사하고 헌신할수록 그게 쌓여서 믿음의 척도가 된다고 착각을 하죠. 하지만 그게 곧 믿음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고 세속적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남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해서 더 나은 평가를 얻고 그래서 축복을 얻으려는 것…. 그렇게 종교적인 열심으로 또 다른 죄를 짓는 건 아닐까요.”

아이들의 달콤한 정거장

일요일엔 주일학교가 열린다. 말이 학교지 그냥 노는 시간이다. 25명쯤 되는 아이들이 모여 여름엔 물놀이를 하고, 겨울엔 눈썰매를 탄다. 봄·가을엔 산을 돌아다니면서 꽃을 따고 열매를 줍고 다람쥐를 쫓아다니며 뜀박질을 한다. 종종 모여 영화를 보고 떡볶이를 나눠 먹거나 부침개도 해먹는다. 김선주 목사는 “처음 이곳에 부임했을 땐 주일학교에서 예배도 안 봤다. 1년 지나서야 예배를 시작했다”고 했다.

―정말 그냥 놀기만 했다는 거죠?

“맞아요. 아주 신나게 쫀득쫀득하게, 열심히 노는 거죠. 이곳 아이들은 다들 상처가 있어요. 부모님이 아이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가버린 경우도 있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죠.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숙제 안 해서, 안 씻어서, 일찍 안 자서 늘 혼나기만 해요. 그런데 교회까지 와서 공부가 되겠어요. 그냥 이곳에서만큼은 무슨 일을 해도 누구에게 혼나지 않고 실컷 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딘가 한 곳은 그런 곳이 있어야 아이들이 마음을 놓고 살죠.”

―그렇게 신나게 놀고 나니 아이들이 달라지던가요.

“그럼요. 돌아보면 저도 그랬어요. 어릴 때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나 읽었던 성경 구절은 단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그저 교회에서 여학생들과 어울려서 손잡고 포크댄스 추고,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수다 떨고 그랬던 순간들이 저를 해방시켰고 성숙하게 했죠. 저는 그런 기억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요. 교회는 아이들에게 뭘 해도 받아주는 재미있고 즐거운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인생을 지배할 강력한 아름다운 추억이 그렇게 이곳에서 꽃 피길 바라는 거죠.”

―그래도 설교를 하셔야 할 텐데(웃음).

“1년쯤 실컷 놀고 나서 슬슬 시작했어요. 그나마도 10분 이내로 간단하게 끝내는데, 이렇게 친해지고 나서 이야기를 하니까 아이들이 정말 제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해요. 그래도 이 아이들이 우리 교회 신자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냥 놀러 오는 거고, 교회는 아이들에게 그저 지나가는 정거장이죠. 그 정거장에서 잠깐이나마 달콤한 바람을 듬뿍 맞고 가도록 해주고 싶어요.”

김 목사는 요즘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맘껏 질문하게 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이를 ‘세상의 모든 질문’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중엔 ‘하나님이랑 예수님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예수님은 목숨이 몇 개예요?’ 같은 것도 있었다고 했다.

―대답하기 어렵겠는데요.

“엄청나게 신학적인 질문이죠(웃음).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목숨이 몇 개일까’. 여기에 대답하려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사흘은 그럼 죽어 있었던 건지 살아있었던 건지, 산다는 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부활하고 나서 예수와 이전의 예수는 같은 분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질문과 답이 또 필요하거든요. 아이들 질문에 함께 고민하다 보면 저도 깊어져요.”

전도체(傳導體)가 될 때까지

사택에 앉아 귤을 까먹던 할머니 중에서 이금선 할머니는 “내가 글쎄 아홉 살에 민며느리로 시집을 갔더랬다”고 했다. “친정아부지가 먹고 살기 힘드니까 시집 안 가면 때려 직인다고 해서 갔지. 고생한 거 말도 못해요. 평생 일을 얼매나 했는지. 열다섯 살에 정식으로 결혼해서 6남매를 낳았어. 아들 둘에 딸 너이. 다시 그래 살라 하면 못 산다.” 김 목사는 “이런 분들의 사연을 다 알고 받아주고 들어주는 게 나의 또 다른 일”이라고 했다.

―대화가 항상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듣다가 쉬다가, 듣다가 울다가, 듣다가 먹다가 그래요(웃음). 교회가 거창한 일을 하려고 드는 순간 위험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가 위로해주고 치유해줄게, 와라’ 하는 것보다 그냥 옆에 앉아 손 붙잡고 들으면 되는 것 같아요.”

‘우리들의 작은 천국’을 넘기다 보면 85세로 세상 떠난 남춘화 할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손톱에 봉숭아물 들이고 환하게 웃던 할머니의 모습을 김 목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돌아가실 때도 그 봉숭아물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가씨, 당신은 당신을 낳은 첫사랑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이 땅의 육신 가운데 시집 보낸 아버지가 딸의 고통을 지켜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리고 쓰라렸는지 이제는 알 수 있겠지요.”

―결국 여기서 누군가의 체온이 되고 싶은 것입니까.

“최고의 소통은 결국 떨림일 테니까요. 교회를 통해 전도(傳道)를 하기보다 전도체(電導體·conductor)가 되고 싶어요. 이곳 시골, 변방에서 사람들과 그렇게 찌릿찌릿 접속해 파장을 일으키고 싶어요.”

영동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내리고 저 멀리 어떤 교회 지붕에 붉은 네온사인이 켜졌다. 교회는 흔할지언정 마음을 물들이는 빛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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