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수 이승환 "바람잘 날 없는 박근혜 정부..날마다 분노에 잠 깬다"

박주연·노정연 기자 2016. 11. 1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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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승환 밴드가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골든마우스홀에서 열린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공개 방송에 참석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선명 기자

가수 이승환씨(51)는 지난 12일 100만명이 운집한 서울 광화문 집회에서 ‘하야 콘서트’를 주도했다. 그는 이효리·전인권씨 등 뮤지션들과 함께 국민위로송 ‘길가에 버려지다’를 제작해 무료 배포하기도 했다.

가수 전인권씨(62)의 도움으로 18일 이씨를 만났다. 그는 “박근혜 정부 들어선 후 아침마다 분노로 잠을 깨고 있다”고 말했다.

- 지난 12일 ‘하야콘서트’ 반응이 뜨거웠다.

“사실 그날 시위 일정에는 공연이 들어 있지 않았다. 제가 (주최 측에) 먼저 하겠다고 나섰더니 크라잉넛을 비롯한 다른 가수들도 하겠다고 해서 무대가 만들어졌다.”

- 지난주 ‘길가에 버려지다’를 만들었는데 어렵지는 않았나.

“소속사가 있는 친구들은 동참하기 힘들어 했다. 회사에서 반대하니까. 그래도 아주 많은 뮤지션들이 선뜻 참여해줬다. 요즘 잠을 잘 못 잔다. 계속 ‘길가에 버려지다’ 작업이 생각난다. 멜로디도 머리에 돈다. 다음주 월요일(21일) 음원사이트에 파트1과 2를 동시에 스트리밍 서비스할 예정이다. 이게 마무리돼야 잠을 좀 잘 수 있을 것 같다.”

- 소속사 건물에 ‘박근혜 하야하라’는 대형 현수막까지 걸었다.

“저는 순간순간 생각나는 것은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다. 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선 후 아침마다 분노로 잠을 깨고 있다. 광우병 파동, 쌍용차 노동자 해고, 국정교과서, 세월호 참사 등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잖은가.”

- 논란이 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것이 “창피하다”고 했다.

“(김)제동이도 없었다. 누가 그러는데 우린 ‘골드 블랙리스트’라고 하더라(웃음).”

- 차은택 감독과 1997년 ‘애원’ 뮤직비디오를 시작으로 20여편의 작품을 같이했다.

“은택이하곤 5~6년 전에 연락을 끊었다. 처음 뉴스에 이름이 거론됐을 시기엔 연락해서 돕고 싶었다. 당시엔 ‘자수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까면 깔수록 계속 나오더라. 지금은 조금의 연민도 없다.”

- 연예인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본다.

“많은 댓글부대가 ‘퇴물, 한물간 놈이 인기 얻으려고 저런 발언을 한다’고 공격한다. 혹은 제가 정치하려고 그런다 하고. 분명히 말하지만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연말 공연이 잡혀 있는데 강성 이미지가 너무 강해져서 표가 잘 안 팔리고 있다(웃음). 분명히 안 좋은 영향이 있지만 공연보다 나라가 중요하지 않은가. 개의치 않는다.”

- 불이익은 없었나.

“지난해와 올해 고등학교 후배인 모 지상파 방송사 간부가 ‘형은 못 나가요’라고 대놓고 얘기하더라. 크게 신경 안 쓴다.”

- 정치적 목소리를 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MB가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부터다. 어떻게 범법 혐의가 있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했는데 당선됐다. 그때 내가 많이 바뀌었다. 행동으로 옮긴 건 ‘광우병 콘서트’가 처음이었다.”

- 당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정의와 상식이 통해야 한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보탬이 된다면 돈은 좀 못 벌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하는 인터뷰 전문.

-요즘 정치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 중 가장 세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수막도 그렇고, 광화문 집회 때도 그렇고. 정말 분노가 느껴지더라. 그런 분노는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나는 항상 분노에 차서 아침에 눈을 뜬다. 여기저기서 듣는 얘기도 많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하루도 분노하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 광우병 파동, 쌍용차 노동자 해고, 국정교과서 문제, 세월호 참사 등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지 않나.”



-지난 12일 민중충궐기 집회 때 ‘하야콘서트’ 반응이 뜨거웠다. .



“사실은 그날 집회엔 공연무대가 예정돼 있지 않았다. 제가 먼저 하겠다고 나서니 크라잉넛을 비롯한 다른 가수들도 하겠다고 해서 무대가 만들어졌다.”



-요즘 대중들의 호감이 뜨겁다. 느껴지나.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연예인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에 안 좋은 시선이 있었는데 이번에 많이 무너진 것 같다. 앞으로는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게) 좀 편해지겠다 싶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 연예인이 그런 얘기를 하느냐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어디 감히 딴따라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안타까웠던 게 그런 시선이었다. 나는 나를 ‘딴따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건 연예인을 폄하하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나는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 지금 하고 있는 음악에 대해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그런 시선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 같고,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점이다.”



-소속사 외벽에 ‘박근혜 하야하라’는 대형 현수막까지 걸었다.



“나는 순간순간 생각 나는 것은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다. 내가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류승완 (영화감독), 강풀(만화가), 김제동(방송인), 주진우(시사인 기자)다. 우리끼리 만나면 다양한 얘기를 나눈다. 누가 ‘현수막이라도 걸어버릴까 보다’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엔 국민위로곡 ‘길가에 버려지다’ 음원을 무료로 배포했다. 뮤지션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준비기간이 길었나.



“즉흥적이었다. 처음에 (이)규호(길가에 버려지다 작사·작곡)가 들어봐 달라며 노래를 보내왔다. 들어봤는데 가사가 너무 멋지더라. 내게 ‘형, 이 노래 누가 부르면 좋을까?’ 묻기에 ‘네 노래니 네가 불러야지’ 했다. 그랬더니 그런 노래가 아니고 자기가 너무 열 받아서 쓴 노래라고 하더라. ‘그래? 그럼 내가 부를게’라고 말했다. 거기에 ‘마법의 성’을 했던 박용준씨가 스태프들을 데려오고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뜻이 맞는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 거다. 이효리씨는 규호가 연락해서 같이 하게 됐고, 백종열 감독은 처음엔 캘리그래피만 부탁했는데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어줬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소속사가 있는 친구들은 동참하기 힘들어해서 거절을 많이 당했다. 이미지 때문에 회사에서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많은 뮤지션들이 선뜻 참여해줬다. 난 요즘 잠을 잘 못 잔다. 계속 ‘길가에 버려지다’ 작업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머리에 맴돈다. 다음주 월요일에 음원사이트에 파트 1, 2 동시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한다. 이것까지 마무리돼야 잠을 좀 잘 수 있을 것 같다.”



-‘길가에 버려지다’ 뿐 아니라 2014년엔 고 노무현 대통령 헌정곡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도종환 작사)를 발표했다. 지난해엔 세월호 노래 ‘가만히 있으라’도 무료로 배포했다. 사회적 문제에 애도나 추모, 또 이번처럼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꾸준히 내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마음이 시키면 몸이 한다’가 내 스타일이다. 삶을 녹여내는 게 내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나만의 음악, 나만의 스타일이다. 물론 사명감도 있다. 운명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얼마 전 논란이 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없는 것과 관련해 “창피하다”고 했다. “분발하겠다”고도 말했다.



“(주)진우가 ‘골드 블랙리스트’라고, 따로 관리하는 리스트에 있을 거라고 하더라. 2014년에 전두환 전대통령부터 이명박 전대통령까지 강하게 비판하며 쓴 글이 있다. 그때가 ‘히든싱어’가 끝나고 대중들의 반응이 뜨거웠을 때다. 그 글을 쓰고 3, 4일 후에 내가 나이 차가 아주 많이 나는 모 모델과 사귄다는 찌라시가 돌더라. 그때 처음 내가 국정원의 관리대상이 됐구나, 싶었다. 나는 비판할 땐 세게 얘기하는 편이다. 진우가 <힐링캠프> 통편집을 당했을 때도 세게 글을 썼다.”



-골드 블랙리스트의 존재, 팩트(사실)인가.



“아니다. (김)제동이도 없길래 우리끼리 따로 관리하는 명단이 있는게 아니냐,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차은택 감독과 인연도 구설수에 올랐다. 1997년 ‘애원’ 뮤직비디오를 시작으로 20여 편의 작품을 같이 했다.



“은택이하곤 5, 6년 전에 연락을 끊었다. 처음 뉴스에 이름이 거론됐을 시기엔 연락해서 돕고 싶었다. 당시에는 ‘자수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까면 깔수록 계속 나오더라. 지금은 조금의 연민도 없다.”.



-연예인들의 정치적 발언을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그로 인해 타격도 있을텐데.



“댓글 부대들이 나에게 씌우는 프레임이 ‘퇴물’이다. ‘한물 간 놈이 인기 얻으려고 저런 발언을 한다’고 하더라. 물론 좋을 건 전혀 없다. 올해 같은 경우 발라드 공연이 연말공연으로 잡혀 있는데 강성 이미지가 너무 강해져서 작년과 재작년과 대비해 표가 잘 안 나간다. 내가 연평균 40회 단독공연을 하는데 90%가 잘 나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안 좋은 영향이 있다. 오늘도 보고 왔는데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27위더라. 예전 같으면 10위 안에 있어야 할 상황인데(웃음). 하지만 괜찮다. ‘공연이 중요해? 나라가 중요하지’, 그런 마음이다. 공연 스테프들과도 관계가 좋아서 표가 잘 안 나가면 스태프들이 내게 받을 돈을 좀 깎아주기도 한다(웃음).”



-정치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다.



“아, 나에게 씌우는 또 다른 프레임이다. 정치는 할 생각이 없다.”



-연예인이 중립을 지키기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시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난 늘 반 발짝 앞장서서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팬들에게 좀 더 앞선 음악을 들려주고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내 팬들만큼이라도 진화된 시선, 진보된 시선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방송출연이라든가, 공연장 대관 문제에서 불이익은 없었나.



“지상파 방송사 중에 출연 못하는 방송사도 있다. 모 지상파 방송사 간부가 고등학교 후배다. 작년에 장난으로 ‘뮤직비디오 한번 틀어줘’라고 했더니 ‘형은 못나가요’ 하더라. 위에서 못하게 하는 것보다 어차피 올려도 안 되니까 그런 것 같다. 올해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크게 신경 안 쓴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특별한 변곡점이 있었나.



“MB가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시작됐다. ‘어떻게 저런 범법 혐의가 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지?’ 했는데 당선됐다. MB는 당시 BBK 사건 등으로 떠들썩했지 않았나. 그때 내가 많이 바뀌었다. 행동으로 옮긴 건 ‘광우병 콘서트’가 처음이었다.”



-또래 가수들보다 젊은 후배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 같다. 정치적 발언을 하면서 주위에 떠나는 사람도 있지 않았나.



“그들이 떠났다기 보다는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 내가 스스로 어울릴 수 없다고 느꼈다. 메인스트림에 있는 친구들이 백조라면 난 오리 같다고 생각했다. 내 휴대폰에 연예인 전화번호도 3명밖에 없다. 5, 6년 전쯤 흥행적인 면에서 슬럼프가 심하게 왔던 적이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음악은 계속 진화하고 있고 창의력도 샘솟는데 왜 그럴까, 고민이 많았다. 그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라이브 무대였고, 그때 홍대 클럽 무대로 갔다. 지금도 열심히 클럽공연을 하고 ‘프리프롬올’이라는 홍대 인디밴드들을 지원해주는 활동도 하고 있다. 처음에 ‘발라드하는 아저씨가 왔어’라고 비웃던 홍대 후배들이 지금은 나를 두고‘제일 좋은 형’이라고 말한다.”



-2011년부터 16년간 매년 ‘차카게 살자’ 콘서트를 열고 공연 수익금 전액을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소설 ‘가시고기’를 읽고 재단에 연락드려서 그때부터 하고 있다. 공연 구호가‘삥땅치지 않아요’다(웃음)”



-지난해엔 ‘차카게 살자’ 기부단체도 만들었다.



“류승완, 김제동, 강풀, 주진우와 하던 친목 모임이 발전된 것이다. 친목모임이라고 하지만 정기적인 만남은 아니고 그냥 생각날 때 모여 밥 먹는다. 그러다 각자의 영역과 관심 분야에서 소외된 사람을 돕고 이들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내자, 의기투합해 기부단체를 만들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공연에서 번 돈도 다음번 공연 무대 제작을 위해 다 쓴다고 들었다.



“돈을 많이 벌면 내가 변할 것 같고 부대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말(정치적 발언)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뭘 지키려고 하는 게 없어서 가능한 것이다. 주변에선 내가 돈을 모으지는 않고 다 쓴다고 걱정하지만 나, 먹고 살 만큼은 가지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게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른 이의 슬픔이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것, 또는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노력한다. 공감하기 위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도 하고 있다. 지금 현 상황은 우리나라 기득권 중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변한다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도 달라질 것이다.”



-‘물어본다’ 가사를 보면 ‘현실과 마주쳤을 때 도망치지 않으려, 피해가지 않으려,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 왔는지 물어본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지금 자신에게 반문한다면 어떤가.



“반문할 필요 없을 것 같다. 나는 내 노래 가사 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참여뿐 아니라 공연활동도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하고 있다. 얼마 전 ‘빠데이7’ 공연에서는 게스트도 없이 무려 8시간 27분 동안 77곡을 소화하는 기록을 세웠다. 50이 넘은 나이에 체력이 대단하다.



“워낙 공연하는 걸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단독공연을 40회하고 있는 뮤지션이 나밖에 없을 것이다. 클럽공연도 많이 하고 전국 곳곳을 간다. 밴드들, 스태프들을 먹여 살려야한다는 의무감도 있다.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나 광화문 집회에서 공연할 때는 나는 노개런티이지만 스태프들에게는 내가 사비로 개런티를 준다. ‘빠데이’ 공연을 한 건, 뮤지션들의 수명을 연장하고 싶어서다. 우리나라는 나이 든 뮤지션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다. 음악이 고루할 것 같고 공연도 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을 불식시키는 선봉에 서겠다는 마음이 있다.”



-이승환에게 나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내가 정말 지천명(知天命)이 넘었다. 천명까진 모르겠고 ‘지인도(知人道)’라고 해야 하나, 사람의 도리까지는 알 것 같다.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물론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탐욕의 길이냐, 아니냐. 나에게 나이는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길을 인도해주는 것 같다. 예전부터 대중들에게는 훗날 어렴풋하게라도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음악하는 후배들한테는 꼭 듣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형 좋아해요’, ‘멋져요’. 그런 말들을 듣고 싶었는데 요즘 듣고 있다. 얼마전 인디밴드들이 뽑은 ‘존중의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김)창완 형님도 계시고 (전)인권 형님도 계신데 내가 뽑혔다는게 너무 기분이 좋더라. 음악적으로 나는 꽤 괜찮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을 음악하는 후배들에게 인정 받았다는 것에 기분이 정말 좋다.”



-올해 남은 공연계획은.



“연말공연이 있다. 12월 2, 3, 4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을 시작으로 내년 4월까지 15개 도시 투어를 한다. 아까 말했듯이 작년 재작년에 비해 표가 잘 안 나간다. 팬들은 이런 얘기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다. 안 나가는 걸 안 나간다고 하지 어쩌겠나(웃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난 부산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살다 서울로 올라왔고 강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연히 우리 집안은, 우리 아버지는 보수적이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내가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니 처음엔 아버지가 한참을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나.



“사업을 하셨다. 한때 부자였는데 보증을 잘못하셔서(웃음). 처음 서울에 왔을 땐 명륜동에 살았지만 망해서 (서울에) 올라왔는 데도 이층집에 살았다. 친구들이 나를 ‘이층집 아이’라고 불렀다. 또 지금 내가 있는 건물(드림팩토리)도 아버지가 물려주셨다. 어쨌든 아버지 공장이 하계동에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 그 가운데로 길이 뚫리며 보상을 제대로 못 받으셨다. 그 일로 탄원서를 내셨다가 남영동에 끌려가신 적이 있다. 그런데도 보수적이시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궁극적으로 어떤 대한민국을 꿈꾸나.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다. 어렸을 땐 누구나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커가며 달라진다. 사회가 스스로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고 감추려 한다. 정의롭다고 하면 뭔가 해코지를 당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보탬이 된다면 돈은 좀 못 벌어도 된다. 그런데 여자는 있었으면 좋겠다(웃음).”

<박주연·노정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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