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대통령 무책임제,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이런 헌법 위반 관행에 대해
국민·학계·언론은 침묵해와
대통령 무책임제 떠안은 채
본인이 빈자리 메워보겠다는 건
국민에 무례하고 염치없는 자세
지난 한 달 국민의 분노는 폭발하고 ‘시민혁명’이란 구호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소용돌이는 4·19나 6월 항쟁 때와 같이 군사독재나 권위주의체제에 대항하는 민주화 투쟁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민주공화국을 지켜가겠다는, 헌법질서를 뭉개버리는 어떤 파행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각오를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국민적 분노와 각오가 창출한 시민에너지를 어떻게 국가적 개혁 과정으로 연계시키느냐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기에 어떠한 경우든 국민과의 신뢰 관계가 깨질 때는 권력을 위임받아 국가 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는 권력자, 즉 대통령은 정통성의 위기와 효율성의 위기를 동시에 맞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처한 오늘의 위기상황이다. 대통령은 이미 이러한 현실을 인식한 듯 본인의 권력과 위상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내려놓겠다는 의사를 국민에게 밝혔고, 국회가 지명한 책임총리 임명을 비롯한 정치권의 과도적 해법을 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더불어 검찰 조사에 성실히 협조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거국적 중립내각이란 해법이 정치권에서 부상되면서 이번 사태를 한국 정치에서의 결정적 반성과 개혁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어설픈 낙관론마저 잠시 들려왔다. 그러나 이러한 수습책이나 해법들도 뿌리 깊은 불신, 나름의 욕심과 이해타산이 만들어낸 동상이몽과 뒤섞이며 정치적 혼란과 국정공백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헌법과 대통령의 운명을, 즉 국가의 백년대계를 논하면서 시간에 쫓겨 최선의 길이 아닌 또 다른 수렁에 빠질 수는 없다. 헌법이 명시하는 탄핵의 수순을 밟으려면 과도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또 대통령 무책임제를 고치는 헌법 개정 역시 같은 이유로 회피하려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바가 전혀 아니다. 대통령을 즉각 퇴진시키는 운동에 앞장섰다가 곧 이은 선거에서 대통령 무책임제를 그냥 떠안은 채 본인이 그 빈자리를 메워 보겠다는 것은 국민에게 무례하고 염치없는 자세로 비쳐질 뿐이다. 모두 숨을 고르고 신중을 기해야 할 때다.
탄핵 외에는 대통령의 잘못을 꾸짖을 방안이 우리 헌법에 없는 것은 아마도 나라의 법통과 체면을 지키는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라는 전제가 숨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해결이란 법과 모양을 동시에 지켜주는 방도다. 법에 없는 ‘2선 후퇴’란 대통령에게 조용히 시간을 두고 물러가는 퇴로를 열어놓는 것이고, ‘거국중립내각’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개혁의 명분을 제공하는 방편이다. 모두의 애국심과 자존심에 호소하는 정치적 해결책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어온 우리 국민의 저력을 보여줄 때가 된 것 같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 '朴 대통령 1호 기부' 880억 청년펀드, 취업은 5%
▶ 구치소 이동하는 장시호, 얼굴 꽁꽁 싸맨 채···
▶ 저승사자가 없다···노무현 탄핵 때와 지금이 다른 점
▶ "대통령 주사 맞아 정신 몽롱" 너무 나간 추미애
▶ 90년대 월수입 5000만원 일타강사 "성공한 것 후회"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