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집필자, "'최순실 교과서' 아니다"

변진경 기자 2016. 11. 1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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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역사 교과서의 내용과 집필진 공개를 한 달여 앞두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박 대통령이 그간 밝혀온 오묘한 역사관과 교육부 주도의 철저한 밀실 집필로 불신받던 국정교과서가 더욱 찜찜해졌다.

가뜩이나 탈 많은 교과서였다. 지난해 10월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공식 발표한 후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다. 교육계·학계·시민사회 등 484개 단체가 국정화 반대 시위에 나섰다. 전국의 거의 모든 역사 전공 대학교수, 중·고교 역사 과목 교사가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국민은 36%(지난해 11월6일 갤럽 발표)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밀어붙였다. 지난해 11월3일 교육부는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검정에서 국정 체제로 바꾸는 고시를 확정했다.

그 교과서의 내용·집필진 공개를 한 달여 앞두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대한민국의 ‘VIP(대통령)’가 대체 누구인지 국민 모두가 헷갈리는 상황에서 ‘VIP의 의지가 워낙 강해’ 강행됐다고 알려진 이 국정교과서도 더욱 미심쩍어졌다. ‘최순실표 교과서’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이미 최악이었던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사IN 조남진 지난 11월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 폐기와 박근혜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국정교과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찜찜하다. 첫 번째는 그간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나 역사 교과서에 관해 해왔던 ‘요상한’ 말들 때문이다. 대표적인 발언이 취임 첫해인 2013년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고려 말 대학자 이암 선생의 말”이라며 인용한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이다. 이 말은 <환단고기> ‘단군세기’ 편에 등장하는 구절인데 <환단고기>는 위서(僞書), 즉 조작된 책이라는 게 주류 사학계의 시각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을 혼란에 빠트린 박 대통령의 ‘혼’ 발언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 대표이던 2008년 5월27일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 축사에서도 박 대통령은 이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박 대통령은 오묘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유난히 ‘혼’ ‘영혼’ 따위 단어들을 자주 사용했다(아래 이미지 참조). ‘영혼합일법(일종의 최면술)’이라는 것을 떠들고 다녔다는 최태민과 그 딸 최순실이 박 대통령의 평생지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시점에서 예사롭게 넘기기 어려운 대목이다.

두 번째 찜찜한 구석은 ‘밀실 집필’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10월12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발표하며 “집필에서 발행에 이르기까지 교과서 개발 과정을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정교과서의 편찬 기준도, 구체적인 내용도, 집필진도 모두 ‘비공개’다. 교육부는 국민 대신 청와대에만 보고했다. 지난해 교육부가 꾸린 국정교과서 관련 비밀 태스크포스(TF)의 업무 중 하나는 ‘BH(청와대) 일일 점검회의 지원’이었다(2015년 10월25일 <뉴스타파> 보도). 청와대가 매일 국정교과서 추진 상황을 점검했다는 이야기다.

극비 사업으로 진행된 국정 역사 교과서의 핵심은 ‘집필진’이다. 누가 쓰는지를 알면 교과서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진에 관해 이제껏 교육부가 밝힌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대표 집필자는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이고 ‘집필진 46명, 편찬심의위원 16명’이라는 것 정도가 공개한 내용의 전부이다.

그나마 신형식 교수와 함께 대표 집필자로 소개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6일 기자 성추행 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 집필진 공모로 충원된 서울의 한 상업고등학교 김 아무개 교사도 같은 학교 교원들에게 “내가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고종사촌 동생인데 남 지사의 도움 없이 이 학교에 왔다” “‘대한민국 집필’ 후 13개월 뒤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따위의 집단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져 지난해 12월10일 집필진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균형 있고 우수한 역사 전문가들로 집필진을 구성하겠다”라는 교육부 발표와 달리 김 교사는 9년간 상업 관련 교과를 가르치다 한국사 교과를 맡은 지는 9개월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집필 교수 “논문 청탁 오면 쓰듯이 교과서 썼다”

현재 집필진으로서 유일하게 공개된 신형식 교수(77)는 보수 성향 사학자이다. 2004년 정년퇴직한 신 교수는 2013년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로 비판받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지지하는 성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9월30일 국정감사에서 “국정교과서 목차를 훑어봤다”라고 말해 심의위원 의혹을 받고 있는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73)도 지난해 10월 국정화 지지 선언에 이름을 올린 보수 성향 원로 사학자이다.

역사학계 등에서 집필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사들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단체들로 구성된 시민단체 ‘국정화저지네트워크’는 지난 5월부터 집필진·심의위원에 관한 제보를 받아왔다. 이 단체 자료에 따르면 ㄷ대 윤 아무개 교수, ㄱ대 박 아무개 교수, ㅅ대 허 아무개 교수, ㄱ대 손 아무개 교수, ㄱ대 한 아무개 교수, ㄱ대 이 아무개 교수, ㄱ대 허 아무개 교수 등이 국정교과서의 집필진·심의위원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보수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사학자이다. 현직에서 은퇴한 고령 학자들이 많고 뉴라이트 계열 출신, 서양사 전공 교수도 섞여 있다.

<시사IN> 취재 결과 이름이 거론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 집필진으로 확인됐다. 서영수 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67)는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진으로 참여한 것을 시인했다. 서 교수는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논란에 대해 “교과서 내용과 상관없는 그런 사회·정치적 문제를 글 쓰는 사람이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논문 청탁이 오면 쓰는 것처럼 교과서도 청탁이 왔을 때 마땅하면 쓰는 거고 싫으면 안 쓰는 거다”라고 말했다. 고구려발해학회와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서 교수는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고대사 부분 집필을 맡았다.

다른 집필진 추정 교수들은 ‘국정교과서 집필진이 맞느냐’라는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곧 교육부가 발표할 테니 기다려라”라거나 “본인한테 물어보는 건 실례다. 사생활이다”라며 확답을 피했다. 심의위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현재 KBS 이사)는 “사실 확인을 해줄 수 없다”라면서도 “기존 검정 근현대사 교과서가 워낙 문제가 많았기에 국정교과서라는 극약 처방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번 국정교과서가 ‘최순실표 교과서’가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최순실이 교과서를 이래라 저래라 할 정도의 지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소설을 쓰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순실이 800억원 예산을 먹었느니 하는데 솔직히 김영삼 아들 김현철이나 김대중 아들 ‘홍삼 트리오’가 국정에 개입한 수준보다는 낮은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국정 역사 교과서를 반대하는 움직임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은 11월7일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지금 당장 중단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서울·인천·경기·강원·광주·전북·경남 교육감도 국정교과서를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학부모 차원의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운동도 진행 중이다.

교육부는 확고하다. 예정대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11월3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순실 의혹과 관련 없이 계획대로 국정 역사 교과서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11월28일 국정교과서 내용과 집필진을 공개할 방침이다. 현재 교과서의 인터넷 웹 전시를 위해 한 업체에 5335만원을 주고 시스템 개발 용역을 맡긴 상태다. 교육부는 의견 수렴을 거쳐 내년 1월 말 최종본을 완성하고 2월에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반대 측도 국정화 철회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국정화저지네트워크 한상권 회장(덕성여대 사학과 교수)은 “독재자인 아버지를 경제 개발 공로자로 둔갑시키는 게 필생의 사업인 박 대통령이 사실상 유일하게 자기 생각을 갖고 진행한 사업이니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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