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을사늑약 111주년 -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선 무슨 일이?

최효안 기자 입력 2016. 11. 17. 16:25 수정 2016. 11. 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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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오늘은 우리나라가 강제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꼭 11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1905년의 <을사늑약>을 ‘조약’이 아닌 ‘늑약’이라 칭하는 이유는 “국가 간의 합의”를 뜻하는 조약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다른 나라와의 외교권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사실상 국권을 잃는 것과 매한가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던 1905년 11월에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그동안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고종을 무능한 황제로만 여겼던 인식이 적지 않았고, ‘을사늑약 때 실제로는 고종이 비준에 앞장섰다’ 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매우 다릅니다.
 
1905년 11월 12일 이토 히로부미는 인천을 통해서 서울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로 고종황제 알현 신청을 합니다. 일본에서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온 <을사늑약>에 고종 강제로 하여금 옥쇄를 찍게 하기 위해서죠.

이토 히로부미 초상 (사진=연합뉴스)

미리 알현 신청을 한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5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만납니다. 오후 2시쯤 이뤄진 만남은 오후 5시까지, 3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습니다. 이날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만남의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서진이 자세하게 정리한 기록으로 정확히 확인됩니다.
 
기록을 연구한 前 국사편찬위원장이자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인 이태진 박사는 고종과 이토의 치열했던 3시간의 설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비서진에서 정리한 회의 기록을 보면, 고종 황제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굉장한 설전을 벌입니다. 고종 황제는 절대로 을사늑약에 조인을 못해주겠다며 세 시간 이상 이토와 대립하죠. 일반적으로 고종은 그저 무력하게 을사늑약에 조인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건 전혀 잘못된 사실입니다. 고종은 끝까지 늑약에 대해서 절대로 옥새를 찍어줄 수 없다고 항거했고, 늑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된 이후에는 국제사회에 더욱 강력한 행동을 취합니다. ” (이태진)
 
이태진 교수는 이날의 기록을 통해 고종이 얼마나 당시 국제 정세에 해박했던지도 엿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날 기록을 보면 고종이 이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아프리카 토후국처럼 되란 말이냐? 토후국이란 영국의 지배 아래 묶여 있던 국가들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고종은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의 지배 체제는 물론 정세를 확실하게 분석하고 있었다는 증거죠. 그러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 한국과 일본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식의 관계냐, 우리는 그런 불평등한 조약에는 절대로 조인을 못해주겠다고 초강경한 자세로 나옵니다.”
 
고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이토는 고종에게 다른 제안을 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이 조약에 대해 무조건 반대한다면, 대한제국의 대신들에게 이 조약에 관한 협상 지시를 내려달라고 하죠. 당연히 고종은 반대합니다. 이처럼 고종은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해 사실상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거부권을 다 행사했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다음날인 11월 16일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당시 최고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에 초대해 호화로운 점심을 대접합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고종 대신 대신들을 포섭하기 위해섭니다. 같은 날, 이토는 일본 군대를 서울 시내에 투입시킵니다.
 
“한국 국민들이 고종황제와 대신들하고 합류해서 저항하는 것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16일 일본군이 궁 주변에서 종일 시위를 하고 성 밖에서 캠핑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무력 시위를 한 것이죠. 총칼을 든 일본군이 궁 주변을 둘러싼 채 종일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압박하는 가운데 늑약에 조인을 강요당하는 고종과 대신들. 그날, 고종과 대신들은 절대로 일본 측이 제시하는 늑약에는 조인을 해주지 않겠다고 굳은 결의를 합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덕수궁 중명전

이처럼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던 상황에서 비극적인 역사의 날은 밝아왔습니다. 17일, 계속되는 일본의 압박에 대신들은 고종을 만나러 가겠다고 덕수궁 중명전으로 갑니다. 그러자 이토의 명을 받은 일본 측의 하야시 공사도 대신들을 따라옵니다.

대신들이 고종을 만난 시각은 저녁 7시쯤. 고종과 만난 대신들은 다시 한번 “절대로 늑약은 거부 한다”는 굳은 다짐을 합니다.
 
고종과 결의를 하고 중명전을 나가려는 그때, 고종과 대신들의 동향을 보고받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중명전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곤 떠나려는 대신들을 중명전 안으로 밀어넣습니다. 이토는 지금이라도 다시 황제를 설득하라고 겁박을 합니다.
 
현재 중명전에 가면 왼쪽 홀 안쪽에 작은 밀실이 있는데, 이토는 이곳으로 가장 강력하게 반대를 한 대신 한규설을 가둬놓고 협박을 할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2명 정도의 대신이 어정쩡한 답변을 내놓는 상황. 결국 이토는 7명의 대신에게 한사람씩 의견을 묻습니다. 이미 일본 측에 매수된 이완용은 대신들이 머뭇거리는 대답을 하면 그건 찬성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이토와 이완용은 ‘조건부’ 조약 체결안이란 카드를 꺼내고 조약문을 멋대로 수정합니다. 여기서 조건부는 전문에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 이런 문안을 추가하는 얄팍한 술수입니다. 이완용은 외부에 있던 정부의 공식 도장인 관인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는 일제가 자신들이 멋대로 만든 조약문에 멋대로 관인을 찍어버립니다.
 
이렇게 을사늑약에 최종적으로 관인이 찍힌 최종 시간은 11월 17일 자정을 넘겨 18일 새벽 1시. 일제는 무조건 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하겠다는 생각에 미리 모든 문서에 체결 날짜는 17일로 써 놓은 상태라, 수정하지도 못한 채 관인을 찍은 겁니다.
 
을사늑약 체결일이라고 일본 측이 주장하는 날짜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자신들이 이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는 셈입니다.
 
을사늑약이 강제된 지 111주년,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망국의 역사는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뼈아픈 역사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을사늑약의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인 중명전은 현재는 정동극장 뒤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사태를 맞아 국가원수의 존재감과 역할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은 이 가을날,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덕수궁 뒤편 정동길을 걸으며 을사늑약 비극의 장소였던 중명전을 통해 111년 전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최효안 기자hyo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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