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블랙리스트 만든 정부, 한강 소설도 '사상검증' 정황

2016. 11. 1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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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문체부, 2013~2016년 세종도서 지원 심사 때
“5·18, 북한 등 다룬 책 다수 탈락” 증언 나와
출판문화진흥원 “출판사 안배 차원 조정” 해명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진흥원)이 주관하는 세종도서(옛 문화부 우수도서) 선정·보급 사업 심사에서 5·18을 다룬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룬 도서들이 다수 배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강은 소설 <채식주의자>로 올해 영국의 세계적 문학상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 일부 다른 분야 심사 과정에서 해당 도서의 ‘사상적 편향성’ 등을 문제 삼는 등 정부가 비판적 목소리를 억누르고 문화계를 통제하기 위해 ‘사상 검증’을 해온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경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진흥원에서 받은 2013~16년 세종도서 관련 자료를 보면, 2014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 3차 심사까지 오른 소설 132권 중 40권이 마지막 3차 심사에서 탈락했다. 3차 심사에서 제외된 작품은 <소년이 온다>(한강·창비), <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민음사), <사자클럽 잔혹사>(이시백·실천문학사), <높고 푸른 사다리>(공지영·한겨레출판) 등이다. <소년이…>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우던 중학생 동호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을 그렸으며. <사자클럽…>은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언어장애를 입은 소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차남들의…>는 1980년대 초 얼떨결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돼 군사정권의 수배를 당한 남자가 자신의 무죄 증명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내용이다. <높고 푸른…>은 한국전쟁과 흥남부두 폭격이 중요한 모티브다. 이외수, 하성란, 전경린, 백민석 등 유명 작가의 소설들도 여럿 마지막 심사에서 배제되었다.

이와 관련해 진흥원의 민경미 출판산업진흥본부장은 “<소년이 온다>는 총 25종까지 선정하도록 한 출판사 안배 차원에서 조정(제외)한 것일 뿐 내용상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진흥원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5·18, 북한, 개성공단, 마르크스, 정치인 등의 키워드가 있는 책 다수가 심사에서 탈락했다”며 “특히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책에 줄을 쳐가며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검사해, 사실상 사전 검열이 이뤄지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실제 <소년이 온다> 선정 여부를 두고 작품성을 높이 사는 심사위원들과 진흥원의 입장이 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뿐 아니라 학술, 교양 분야에서도 검열의 흔적이 발견됐다. 진흥원이 제출한 자료를 보면, 일부 심사위원들이 수기로 남긴 심사총평에서 “도서의 사상적 편향성에 대해 검토하였음”(2014년), “편중된 시각의 작품 등을 조정”(2014년), “다소 정치적 성향의 도서를 제외”(2015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세종도서 심사위원회 공통 심사기준은 △기획의 창의성과 예술성 △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는 도서 등이다. 도서의 사상적 편향성은 아예 기준에 포함돼 있지 않다. 민 본부장은 “도서의 사상적 편향성을 검토했다면 심사위원의 소신에 따른 것일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2014~15년은 청와대가 주도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도서 이념 논란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2014년 하반기부터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집중적으로 블랙리스트가 문체부로 내려왔고, 그해 진행된 2015년 우수문예지 발간지원사업에서부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이미 작동했다는 증언이 나왔다.(<한겨레> 11월8일치 1·6면, 11일치 13면) 2015년 1월에는 문체부가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 문학작품’과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작품을 세종도서 선정기준으로 삼았다가 작가회의 등에서 반발하자 이를 철회한 바 있다.

2015년에는 ‘세월호’와 관련된 작품들이 대거 세종도서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증언들도 나온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정혜신 진은영·창비), <사회적 영성>(김진호 외·현암사),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창비), <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미지북스) <눈먼 자들의 국가>(김애란 외·문학동네) 등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를 출간한 문학동네와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낸 창비에 불이익을 주었다는 추측도 있다. 2015년 창비와 문학동네의 책이 세종도서에 선정된 비율은 전년도의 5분의 1에 그치는 대여섯권에 불과했다. 그러나 진흥원 쪽은 “세월호를 다룬 책을 제외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며 “표절 문제나 사재기 등의 문제가 불거진 출판사의 책 선정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요구가 출판계에서 나와 조심스러웠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올해 발표된 학술부문 심사 결과에서도 근현대사나 정치 현안 관련 책들이 배제되는 경향은 여전하다.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 잊힌 전쟁, 오래된 현재> <조만식과 해방후 한국 정치>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등이 1차 심사에 선정되었지만 최종 제외되었다. 사회과학 분야 ‘정치/행정2’ 소분과에서는 1차 심사를 통과한 10권 중 9권이 탈락했다. <박순천 연구> <다른 삶은 가능한가> <개성공단: 공간 평화의 기획과 한반도형 통일 프로젝트> <1972 한반도와 주변 4강 2014> 등이다.

소설가 한강. 한겨레 자료사진

세종도서로 선정되면 진흥원이 1종당 1천만원 이내로 구입해 공공도서관, 전국 초·중·고교, 사회복지시설 등에 배포한다. 출판계 불황 속에서 출판사들로서는 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국가가 책을 우수도서라며 승인하고 선정하는 것 자체가 후진적 시스템으로, 양서 출판과 보급을 구조적으로 지원하려면 예산을 도서관 도서구입비 증액 쪽으로 가닥 잡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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