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_출근] 내 정치성향? 그게 대체 뭣이 중헌디!

김나영 기자 입력 2016. 11. 1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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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이서경 대리의 고군분투 직장일기

지난 12일 사상 첫 100만 촛불집회. 엄중한 ‘역사의 무게’ 덕에 달콤한 자리는 아니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집회가 펼쳐지면서 ‘축제의 현장’으로 탈바꿈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 그곳에 영광스럽게도 나 역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형언하기 힘든 뿌듯함을 선사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몸은 분명 피곤한데도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렇게 벅찬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아침. 회사에서도 주말 촛불집회가 화제였다.

문제는 이를 ‘빌미(?)로’ 느닷없이 정치성향 검증이 시작됐다는 것.

#. 팀장님 저한테 훈계 하실 일 아니거든요? 오그래 팀장 : “이 대리는 토요일에 광화문 갔나?”

나 : “뭐···(오 팀장은 ‘수구꼴통’으로 유명하다)팀장님은요?”

오 팀장 : “나야 집에서 TV로 봤지. 시국이 이러니 심란하더라고. 이 대리는 야당 성향이니까 당연히 갔겠구만”

나 : “(야당성향?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말씀하신 대로 시국이 이러니 목소리 내려고 나가긴 했어요. 성별·나이·정치성향과는 관계없이 정말 많은 ‘시민’들이 모였던데요.”

박송곳 대리 : “어쨌든 야당 쪽인 시민들이 많지 않았겠어요? 정치인도 보면 문재인·박원순 같은 거물급이 총출동했던데···그게 뭐 어때서 말을 안 하려고 해요?”

오 팀장 : “사실 난 ‘보수’이긴 하지만 그래서 촛불집회 안 간 건 아니고 그렇다고 탄핵이 답이라고는 또 생각 안 하거든. 박 대리는 어떤가?”

박 대리 : “저도 팀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하하”

오 팀장 : “아, 그래? 역시 박 대리는···(말을 해요 말을!! 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거야?)요즘은 이 대리 같은 2030이 많긴 하지. 그래도 무조건 비난만 하는 건 말이야···”

그 후로도 오 팀장은 내게 10여 분간 훈계를 해댔다. 내가 삐뚤어진 시선으로만 세상을 본다나? 나는 절대로 회사 내에서 정치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면 도무지 빠져나갈 틈을 찾을 수가 없다.

시어머니보다 시누이가 밉다는 그 심정 100% 공감한다. 박송곳 대리 밤길 조심하라고요…

#. SNS 친구 ‘절대로’ 회사 동료와는 맺지 마라!

재무팀의 오 대리는 동기들 사이에서 ‘일베충’으로 불린다. 오 대리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극보수 성향을 가진 정치 기사로 도배돼있기 때문이다. ‘일베충’이라는 상큼하지 않은 별명을 갖게 됐다는 건 정작 오 대리만 모르는 일이다.

내가 두려운 건 이 지점이다. 어느 누군가는 나를 ‘빨갱이’라고 불러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오 팀장이 내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한 순간, 당연히 ‘무시’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실수로 정말 실수로 ‘수락’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헉 ㅠㅠ 이건 아냐~ 절대 아냐~~ 꿈이라고 말해줘~~~;;;)

엄마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되는 걸까…. 엄마 미안해 ㅠㅠㅠㅠ

역시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핸드폰 그것 좀 제발 놓고 살라는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SNS도 이제 자기검열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온갖 생각이 들었다. 친구수락 버튼은 족쇄가 됐다.

꼬투리 잡으려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오 팀장이 내 페북을 훑으며 이런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이런 생각에 휩싸이고 마는 상황에 짜증이 치민다.

‘정치와 종교는 대화 주제로 삼지 말라’는 상식도 없는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정치에 옳고 그름이란 게 있을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물어봤을 때 시원하게 대답해’라고.

시원하게?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내가 설명해주지.
(시원하게?)

내 경우에 이렇게 무책임한 조언(?)을 따를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정치성향이 뚜렷하지 않다.

직장 동료들에게 (아주 친한 경우는 제외하자) 한 번 물어보시라. ‘나는 보수야’ 또는 ‘나는 진보야’라고 댁들이 원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질문 자체가 웃기다. 무 자르듯 반으로 뚝 갈라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책별로 사안별로 지지하는 당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대체 왜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북 정책에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성과연봉제는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일관성이 없는 게 아니라 일관성을 요구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걸 대체 언제쯤 깨닫게 될 런지. 대답하고 싶지 않지만 대답하려고 해도 ‘정답’이 없다.

두 번째, ‘ㅇㅇㅇ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여자가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힘들다’는 핀잔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승진에 욕심이 없어서? 그건 아니다. 직장 내에서 인정받고 싶고 그 누구보다 자격도 충분하다고 자부한다.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특정 계파에 소속될까 두렵다.

‘빽으로 흥한 자, 빽으로 망한다’가 내 지론이다. 임원급 인사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존재 아니던가.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갑자기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하고, 다들 가망이 없을 거라고 고개를 내젓던 사람이 주요 보직에 오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업무능력’ 못지않게 CEO에 줄을 잘 댔다는 이유로, 혹은 CEO의 정치적 견제나 판단에 따라 ‘조치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에 정치성향(그리고 출신 지역···한국사회에서 둘은 뗄 수 없는 관계니까)을 당당하게 밝히는 건 약보다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ㅇㅇㅇ의 사람’으로 분류됐다가 ‘그 분’이 미끄러지면 어떡하나 하는 인간적인 두려움이 눈 앞에 놓인 탄탄대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렇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알지만 봐줄래? 나름 폭풍 검색해서 찾아낸 정보거든?

이른바 ‘사상검증’으로도 불리는 이 질문들은 따지고 보면 법적 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다. 나의 ‘초특급 검색질’로 찾아보니 근로기준법 제6조에는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남녀의 성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고,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고 명시돼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모든 이가 종교·성별·국적 그리고 정치성향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의 맹점이 바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 정반대의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까?

미국도 그렇다고 한다. CEO 따라 직원들의 정치성향이 변한다고 한다. 누가 그들을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저 대세를 따르고 싶은 소시민 직장인일 뿐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진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우리나라 기업에서만 정치성향이 중요한 기준은 아니란다. (이건 희소식일지도···. 우리나라만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왜 이런 데서 썩고 있어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을 테니···.)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이탈리아 보코니대학교·스위스 루가노대학교의 경영학 교수 3명이 1999년~2014년 미국 상·하원 선거와 대선 등 연방선거와 미국 기업 2,000여곳 CEO의 정치성향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직원들의 CEO 추종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CEO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직원들은 평균 3배나 많은 기부금을 낸 것으로 조사됐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거둬들인 기부금을 살펴보면 CEO가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 기업의 경우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선거 기부금을 3배 가량 더 냈다. 연구진은 CEO와 직원들이 공통된 기업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공유하기 때문에 동일한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CEO의 정치성향이 급작스럽게 바뀌면 직원들 역시 정치적 노선을 급하게 변경하는 경향이 발견됐다. ‘대세’와 윗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나 같은 ‘소시민’ 직장인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이다.

날 좀 내버려 두세요...
그러니 우릴 좀 제발 내버려 두시길 간절히 부탁 드린다.

안 그래도 눈치 보느라 하루에도 눈알이 수십 번씩 돌아가고 있으니까. ㅠㅠ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 ‘#오늘도_출근’은 가상인물인 32살 싱글녀 이서경 대리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우리 모두의 직장 생활 이야기입니다. 공유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언제든 메일로 제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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