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故 백남기 농민 사태', 논란을 끝내자

강청완 기자 입력 2016. 11. 13. 09:45 수정 2016. 11. 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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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남기 농민 사건 1년' 총정리


지난 5일, 고(故)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이 열렸다. 서울대병원과 명동성당을 거쳐 광화문 광장에서 치러진 영결식에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백 씨가 사망한 지 41일 만이자,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은 지 358일 만의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느 한 사건에 시간의 무게가 더해질 때, 그 사건 위에는 다양한 이름의 더께가 내려앉는다. 논란이 생겨나고 사건의 당사자가 늘어난다. 단순한 본질보다 복잡한 곁가지들이 주변을 에워싼다. 이념이 올라타고, 색깔이 입혀지면서 새로운 갈등이 뻗어 나와 몸통을 가린다. 나쁘게 말 하면 때가 타고, 좋게 말하면 의미가 더해진다. 비슷한 예로, 세월호 사태가 있었다.

‘고(故) 백남기 농민 사건’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단순했다. 농민 운동을 해온 칠순 노인이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경찰이 책임 소재를 부인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검찰은 고발장을 받고도 수사하지 않았다. 사건은 거리를 배회하다 국회로 넘어갔다. 책임 규명과 사과 대신 이런 저런 ‘논란’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불법 시위와 공권력 논란, 물대포의 위력 논란, 사인과 진단서 논란 등이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느닷없이 ‘빨간 우의’같은 괴담까지 튀어나왔다.
 
‘논란’이란 말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서, 사실과 논리, 책임과 인과(因果)같은 것들을 모두 삼켜버린다. ‘논란’이란 한 단어만 바윗덩이처럼 남는다. ‘백남기’란 이름 석 자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번 사건을 명확하게 알고 시원하게 해법을 말하는 이는 점점 드물어 갔다.

그러나 이 논란들까지 백남기 씨와 함께 묻을 수는 없다. 1년 가까이 이어진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사건이 한 사회를 보여주는 단면이라면 ‘고(故) 백남기 농민’ 사태가 남긴 궤적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말해주는 적나라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책임 규명은 되지 않았고 이곳저곳에 벌어진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백 씨가 영면에 든 이 시점에서, 한 번쯤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
 
 ▶ 고 백남기 농민 사건 일지 (출처: 뉴시스)
 
● 정당한 공권력 집행이었나?
 
결국 사태의 출발은 여기서 부터다. 다른 이의 표현을 빌자면 ‘외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할 주체(공권력)가 국민에게 외상을 가했다’는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과잉진압인지 아닌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를 검증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경찰은 살수차 운용지침을 준수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공개된 사고 당시 동영상은 적나라했다. 물대포는 백 씨의 머리를 겨냥했고 쓰러진 뒤에도 15초 가까이 살수가 지속됐다. 규정은 물론, 경찰의 해명과도 거리가 있었다. ‘표적’을 겨냥한 조준사격의 흔적이 역력했다.
 
해명을 하겠다며 경찰이 선보인 살수차 시연(2015.11.16)은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까웠다. 표적도 세우지 않고 중간에 물이 떨어졌다고 버티다가 끝났다. 보여주고픈 것만 보여주고 끝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보다 못해 방송사 시사프로그램이 역할을 대신 했다.

강화유리까지 박살 낸 살수차 물대포의 위력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쏜 같은 강도의 물줄기에는 벽돌 1.2톤이 허물어졌고 강화 유리가 산산 조각났다. 국정감사장에 나온 전산유체역학전문가는 당시 물대포의 위력이 “제일 큰 상용차 엔진을 돌릴 수 있는 힘보다 더 큰 위력”이라고 증언했다.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대처는 더 옹졸했다. 있는 상황보고를 없다고 둘러대다 들통이 났고, 백 씨가 숨진 뒤에는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영장을 들이밀었다. 물대포에 맞아 숨진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의도였는데, 심지어 한 차례 기각당한 부검영장을 재신청하면서는 괴담 수준인 ‘빨간 우의 타격설’을 집어넣었다.
 
이쯤 되면 정황과 책임은 명백하다. 아무도 경찰의 해명을 믿지 않는다. 논리가 부족하고 궁색했기 때문이다. 경찰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공권력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과잉 진압이 이뤄졌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게 맞다. ‘불법 시위’라는 일방적인 규정이 과연 정당한가는 차치하고, 사람이 죽었다면 사과하고 유가족에게 보상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뒤늦게 “우리 탓이 아니야” 라며 집요하게 부검을 시도한 건 비겁함에 가까웠다. 작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더 큰 무리수를 반복하다 화를 키운 셈이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을 때 경찰이 잃게 될 것과 지금 경찰이 잃은 것, 어느 쪽이 더 큰가?
 
한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불법시위에는 엄정 대처해야한다’는 명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폭력 시위에는 원칙을 가지고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엄정 대처’가 곧 ‘죽여도 된다’ 는 뜻이 아님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나아가, 애초에 ‘불법’을 규정하는 것은 누구의 뜻인가? 고인이 거리로 나선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쌀값 인상 공약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1만 원 대 인상을 약속했던 쌀값은 13만 원 대로 폭락했다. 이에 항의하는 농민을 불법 시위꾼으로 규정하고 엄정 대처하겠다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으나 어른이 아이와 시합을 벌이는데, 아이가 사전에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항의하자 금 넘어왔다고 때려죽이는 꼴이다. 그들이 거리로 나서기 전에 공약 파기를 사과하고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이 정권에 있었나 묻고 싶다. 대한민국에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기준은 너무 가혹하고 강자의 논리만을 따른다.
 
“정직하게 땀 흘려 기른 우리 먹거리의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외침이 살수 대포에 참혹하게 죽어야 할 정도로 부당한 요구였나” -김희중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고 백남기 장례미사에서
 
무엇보다 ‘공권력’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경찰이 아무렇지 않게 시민을 구타하고 거리에서 머리를 자르고, 치마 길이를 재며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던 때가 있었다. 숱한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는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다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시민 스스로가 위임한 공권력이 도리어 시민을 해칠 때, 그 힘은 정당성을 잃는다. 정작 우리 공권력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대상이 시민의 안전인지 아니면 배후의 권력이었는지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백 씨에 대한 경찰의 공권력 집행이 결코 정당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사망진단서와 다른 의무기록

● ‘고 백남기 사망 진단서’는 제대로 작성됐나?
 
백 씨가 사망한 뒤 불거진 사망 진단서 문제는 이번 사태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갔다. 서울대병원은 외상성 뇌출혈로 3백 일 넘게 혼수상태에 빠졌던 백 씨의 사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재했다. 물대포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선행사인은 ‘외상성 뇌출혈’로 적어 놓고도 말이다. 의사협회 지침을 비롯한 의학적 원칙도 어긴 조치였다. 백 씨의 사망 직후 병원 측이 경찰과 긴밀히 연락하고 상의한 정황도 드러났다.

▶ 9월 29일 8시 뉴스 [단독] 사망진단서와 다른 의무 기록.. 원칙 어긴 병원 
 
앞서 언급한 시위와 공권력의 문제는 정치적 견해가 엇갈릴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르다. 의학의 영역이자 객관적 사실의 문제다. 전례가 있고 원칙이 있다. 의사라는 직업에 우리 사회는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건강과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의도와 계산이 개입됐다면, 그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건 물론이고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관련 보도가 잇따르자 가장 먼저 서울대 의대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배운 것과 다르다는 거다. 현직 의사가 대부분인 서울대 의대 선배들도 동조했다. 같은 서울대병원에 적을 둔 최고권위의 법의학자들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과 서울대 의대 합동 특별조사위원회마저 “담당 교수가 일반적인 지침과는 다르게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고 결론 내렸다. 대한의사협회도 진단서 작성에 ‘오류가 있었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이후의 전개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결론적으로 모두가 아니라고 하고 주치의 백선하 교수만 ‘맞다’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한민국 최고 권위와 실력을 가진 의학이 권력의 논리 앞에 일그러졌다. 아프고 힘들 때 의사를 찾는 시민들은 이제 누구를 믿어야하는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백남기 씨 사망진단서 논란 서울대병원 공식 발표

백선하 교수는 국정감사장에서도 ‘병사가 맞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백 씨가 체외투석 등 적절한 치료를 받고도 사망했다면 사인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거부한 유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투였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유가족이 연명치료를 거부하더라도 좀처럼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사인은 다르지만,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 직전 유가족이 체외투석을 비롯한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그때는 아무도 유가족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과 어떻게 비교를 하냐고? 의학 앞에선 누구나 평등한 것 아닌가.
 
최고책임자인 서창석 서울대병원장 역시 국정감사에서 ‘진단서 작성이 잘못됐다’는 특조위 조사 결과를 인용하면서도 “진단서 작성은 주치의의 고유 영역”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비껴갔다. 책임자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문가의 권위와 소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진단서는 바뀌지 않았고 경찰이 부검 영장을 신청하는 근거가 됐다. 기자는 당시 사망진단서를 작성하고 잠적한 레지던트 의사가 윗선으로부터 모종의 압력을 받았다는 정황을 취재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기사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 레지던트는 자신의 SNS에 “진실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남겼었다. 이제는 됐다. 그동안 밝혀진 것들만으로도 다수의 시민은 판단을 끝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 부검 논란, 정말 필요했나?
 
백 씨 사망 이후 불거진 부검 논란은 각자의 의견차가 가장 뚜렷했던 부분이다. 부검을 해야 한다는 쪽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서면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한때 전운이 감돌았다. 결과적으로 장례가 무사히 치러지면서 불가역적인 영역이 되었지만, 논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백남기 부검 반대

기자가 판단컨대 심정적으로는 부검에 반대하는 유족 측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이성적으로는 “부검을 하면 깔끔한 일 아닌가”하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남 일 얘기하듯 하지만 기자 역시 취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조건을 전제로 유가족에 부검에 응할 것을 권유한 바 있다. 유족 측 역시 한때 부검을 전향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안다. 부검의 모든 절차를 촬영하고, 부검 장소와 방법 등에 대해 유가족의 의견을 반영하며 의사를 포함해 유가족이 지정하는 참관인을 입회케 하는 등,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서 내건 조건들이 나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제를 논하기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애초에 ‘부검’ 카드를 꺼낸 쪽이 어느 쪽이었나 하는 점이다. 검찰과 경찰은 백 씨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3백 여 일 동안 부검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다가 사망 직후 느닷없이 부검을 언급하고 나섰다. 물론 부검을 논하려면 사후(死後)에 하는 것이 절차적으로 맞다.

그러나 이전에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백 씨의 부상이 물대포에 의한 외상이었음을 이미 인정한* 경찰이 갑자기 “사인을 정확히 규명 해야겠다” 고 나선 건 자가당착일 뿐 아니라 모종의 의도가 있었다고 볼 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 이전의 쟁점은 사실상 경찰의 책임 인정 여부와 살수차 운용 지침 위반 여부였지, 다른 게 아니었다. 부검은 과학에 의존한다. 새로운 쟁점을 만들어 이른바 또 다른 전선(戰線)과 프레임을 구축하기 좋은 소재다.
 
* 주1: 경찰은 2016년 5월 9일 백 씨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민사소송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2부) 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백남기가 살수차의 살수에 맞아 외상성 경막하출혈이라는 부상을 입은 사실은 인정한다”고 적었다. 또 ‘물대포에 최루액을 혼합 살수해 위험이 가중됐다’는 유족 측 주장에 “(외상성 경막하출혈은) 살수 압력이 그 원인인 것이지 최루액이 그 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부검의 사전적 의미는 ‘사인(死因)·병변(病變)·손상(損傷) 등의 원인과 그 정도 등을 규명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검사하는 일’이다. 법적으로는 사망에 이르게 한 과정에서 확인이 더 필요한 사안이 있어야만 부검을 의뢰한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스스로 물대포가 사인이었음을 인정했다. 검경에 의해 부검 논란이 새롭게 떠오를 때까지 사실상 물대포 외에 다른 가능성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있었다면 이제 와서 언급할 가치조차 있나 싶은 ‘빨간 우의 가격설’ 정도다. (놀랍게도 여당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장에서 이를 거론했지만 말이다) 사건 발생 317일 뒤에야 새로운 걸 확인해보자고 나선 경찰은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검토할 순 있었다는 의견도 여전히 유효하다. 논란을 가장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란 이유에서다. 이번 사건에서 서울대병원 서울대의대 합동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를 비롯해 다수의 법의학자들 역시 “선행 사인이 분명해 부검이 필요치 않을 것으로 본다” 면서도 논란을 종결시키기 위해 부검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반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없던 ‘논란’을 만들어낸 쪽은 어느 쪽인가? ‘부검 논란’은 누구를 위한 프레임이었나?
 
역시 아주 적확한 비유는 아니겠으나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례를 들어보자.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오래 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했던 것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독도는 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로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할 어떤 이유가 없다”고 거부하고 있다.

우리 영토임이 명백한 상황에서 이를 재판소로 가져가는 건 일본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우리 정부의 독도에 관한 입장은 1996년부터 “국제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한국의 영토이다”. 단 ‘1%’의 가능성도 내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다툴 바에 차라리 재판 가서 우리가 이기면 깔끔하지 않나”라고 주장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백번 양보해 부검, 할 수도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전에 가해 주체의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 인정이 선행되었어야 했다. 검찰은 수사에 착수하고 잘잘못을 가려야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카운터파트가 되는 게 먼저였다. 진정 논란을 피하려 했다면, 검경이 아닌 ‘제3의 기구’에 의한 제안도 검토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살수차에 의한 외상이 맞다” 고 했다가 말을 뒤집고 부검 영장에 스스로 조사조차 하지 않은** 빨간 우의 ‘괴담’을 써넣었다. 고통 속에 죽어간 남편 또는 아버지의 시신을 그 손에 선뜻 내줄 유족은 많지 않아 보인다.
 
** 주2 : ‘빨간 우의’의 주인공으로 밝혀진 남성에 대해 경찰은 지난해 12월 집회·시위법 위반과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조사한 후 올해 3월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빨간 우의 가격설에 대한 조사나 언급은 당시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남기 농민 장례

결과적으로 유족은 부검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고(故) 백남기 씨는 358일 만에 땅 속에 묻혔다. 그렇다면 이제는 유족과 고인의 뜻을 존중하는 게 옳다. 인도적 차원 뿐 아니라 당위성으로 봐도 그렇다. 우리 수사 기관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남아 있는 기자의 바람대로라면, 부검에 응해서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면 판정승은 거뒀다. 경찰이 앞서 인정한대로 사인은 명백하게 귀결됐다. 다른 사인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빨간 우의 말고는.
 
마지막까지 빨간 우의를 이야기하며 부검을 주장했던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물대포를 직접 맞아 보겠다고 손을 들었다가 조용히 손을 내리고, “유족이 물대포를 맞고 증명하라”고 인면수심의 궤변을 늘어놓았던 이용식 건국대 의대 교수다. 이 교수는 급기야 “손에 피가 나서 종이 찾으러” 시신 안치실까지 침입했다가 건조물침입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이쯤되면 이 구도는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몰상식, 이성과 비이성의 구도였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 농민 백남기 사태, 끝나지 않았다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고 백남기 씨 유족이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 경찰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민사재판이 열렸다. 백 씨의 첫째 딸 백도라지 씨는 재판에서 고(故) 백남기 씨가 ‘법적 근거가 부족한 국가의 과도한 폭력’으로 희생됐다며 국가의 책임을 물어달라고 호소했다. 피고 측은 이에 “경찰이 당일 시위에 방어적 측면에서 살수차를 사용한 것”이라면서 당시 시위의 양상을 확인해야 한다고 맞섰다. 다음 재판은 12월 23일에 열린다.
 
한때 당론으로 ‘백남기 특검’을 추진했던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도 “기회가 되면 다시 특검을 추진할 계획이 있다”이라고 밝혔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다른 이슈가 모두 묻히긴 했지만, 검찰 수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여전히 특검 추진의 필요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자 황교안 총리에게 오방끈을 건네 한때 포털 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했던 이재정 의원은 기자에게 “최종적으로 책임자를 처벌해 경찰 내부에서도 변화의 계기가 되도록 균열을 내는 게 목표”라는 의견을 나타낸 바 있다.
 
이번 사태는 결국 오늘날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보여준 사례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국민을 다치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사고였다고 치자. 문제는 이후의 과정이었다. 사과와 보상은 없었다. 재발 방지를 위한 약속도 없었다. 공작에 가까운 은폐와 번복, 책임 회피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정의는커녕, 인간에 대한 최소한 예의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이번 사태로 촉발된 여러 논란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적나라한 민낯을 보여줬다. 국가 기관 뿐 아니라 다른 사회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커지기 전까지 대다수 기성 언론은 이번 사태를 외면했고 본질보다는 가십에 주목했다. 독재 정권 시절 학생 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했던 고인은 그 외 다른 범죄전력이 없는데도 ‘농민 운동가’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이유로 (우리밀 살리기 운동 등을 했다)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고인의 딸들은 아버지가 지어준 백도라지, 백민주화라는 이름만으로 매도를 당했다. 정작 그 딸들은 학생 운동을 해본 적도, 특이한 경력도 없이 오늘날 우리 주변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그 딸들의 이름이 꽤나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아비가 지어준 자식의 이름을 가지고 색안경부터 찾는 것은 천박함에 다름 아니다. 막판에는 유가족의 오래 전 예정됐던 외국행까지 논란이 됐다. 유가족은 “너무 괴롭혀서 슬퍼할 새도 없다”고 할 정도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했다. 고인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목소리가 미약한 계층으로 분류되는 ‘농민’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관련 비디오머그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 지난 300일을 말하다
 
농민 백남기 씨의 죽음은 유족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언제나 그렇듯, 더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다. 상처 위에 새 살을 돋게 해 후손들에게 좋은 선례를 넘기는 것, 이번 일로 말미암아 공권력이 함부로 시민을 해치지 않게 하고, 국가가 국민을 더 존중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다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한 사회는 조금씩 성숙해져간다.
 
지난 5일 열린 고인의 영결식이 ‘정권 퇴진’을 외치는 촛불집회로 연결되는 장면은 꽤나 상징적이었다.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시민들 뿐 아니라 정치인과 시민단체 인사 등 각계각층의 인파가 몰렸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든, 그렇지 않든, 광장에 몰려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정권 퇴진’을 외쳤다.

최근 불거진 ‘최순실 게이트’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지만, 358일 만에 열린 고인의 영결식이 일종의 촉매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부인할 수 없다. 고인의 장례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지난달 28일 경찰이 부검 영장 재신청을 포기하면서부터였다. 며칠 앞서 터진 최순실 게이트와 이어진 청와대 비서진 교체, 대통령 대국민사과와 전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경찰 내부에선 ‘어디서부턴가’ 이어져오던 동력이 끊겼다는 말도 나온다.
 
그렇게나 공고하고 엄혹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벽들이 차례차례 쓰러지면서, 막혔던 길들이 열리는 느낌이다. 사필귀정이다. 바르게 돌아가는 과정은 멀고 험난해도 역사는 그렇게 나아진다고 믿는 사람과 시대에 의해 앞으로 더 나아간다. 유가족에게는 죄송하지만 고(故)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헛되지만은 않은 이유다.        

강청완 기자blu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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