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시민의 명령]헌정 유린 '막장 드라마'..진짜 주인공은 박 대통령

[경향신문] 괴기소설을 연상케 하는 ‘최순실 막장 드라마’의 끝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최순실(60·구속)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국정을 쥐락펴락하면서도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그는 지난 3일 구속됐지만 ‘최순실 게이트’ 의혹은 매일같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 지난 1개월여 동안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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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의 ‘개인 사정’이 발단

K스포츠재단 설립의 발단은 지난해 이화여대 1학년이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20)의 갑작스러운 개인 사정이다. 최순실은 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독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승마 강국’ 독일은 그렇잖아도 딸이 해외 전지훈련을 가고 싶어하던 곳. 서울 강남의 건물 여러 채를 보유하고 이미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만 최순실은 자신의 돈은 쓰고 싶지 않았고, 쓸 필요도 없었다. 실세임을 일찍부터 알아본 삼성이 정유라를 위해 그랑프리 우승마 ‘비타나V’를 제공했다. 대한승마협회는 마사회 감독 출신인 승마 코치를 지원했다. 하지만 2020년 올림픽까지는 앞으로도 4년이 더 남았다. 최순실은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딸의 승마를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하루 만에 재단 설립허가

무슨 이유인지 그 까다로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이 세종시에서 서울로 출장까지 와서 K스포츠재단 설립허가증을 하루 만에 발급했다. 삼성·현대차·SK·LG·포스코 등 19개 재벌·대기업들은 K스포츠재단에 피 같은 돈 288억원을 아무 조건 없이 냈다.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57·구속)이 압력을 넣고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57)이 총대를 멨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최순실은 이왕 만드는 김에 ‘미르’라는 재단을 하나 더 만든다. 정관 등이 K스포츠재단과 똑같은 쌍둥이 조직이고 출범 일정도 비슷하다. ‘한 몸에 머리만 둘’이다. 미르재단에는 재벌 돈 486억원이 모였다. 지난해 10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듣보잡’에 의해 운영된 재단

700억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굴리는 미르·K스포츠 재단은 그러나 ‘듣보잡 인사’들로 운영됐다. K스포츠재단 2대 이사장은 최순실의 단골 마사지업체 대표 정동춘(55)이 맡았다. 미르재단 이사장은 최순실의 측근이자 사업 파트너인 차은택(47·체포)의 대학원 은사였던 김형수(57)가 임명됐다. 대통령 퇴임 후를 대비한 조직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85)이 재임 시절 만든 ‘일해재단’에 비유됐다.

■모든 돈은 최순실 비밀 계좌로

최순실은 K스포츠재단의 사업목적과 똑같은 ‘더블루K’라는 회사를 세워 재단의 돈을 그대로 빼돌릴 수 있는 ‘파이프’를 깔았다. 최종 귀착지는 최순실·정유라 모녀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독일의 페이퍼컴퍼니 ‘비덱스포츠(비덱)’다. 대기업에서 뜯어낸 돈이 K스포츠재단과 더블루K를 거쳐 비덱을 통해 최순실 모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최순실이 독일에 ‘정유라 타운’을 세우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국내 은행의 적극적인 협조와 금융당국의 묵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도 나왔다.

■최순실의 사업 동지 차은택

차은택은 미르재단을 접수했다. 재단 이사진은 차은택 측근으로 구성됐다. 창조경제추진단장·문화융성위원 등의 직함을 가졌던 차은택은 정부의 문화계 조직도 장악했다. 장관에 전 직장 상사인 김종덕(59)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 자신의 외삼촌인 김상률(56)이, 차관급인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 CF감독 시절 ‘은인’이었던 송성각(58·구속)이 임명됐다. 송성각은 포스코 계열 광고회사 ‘포레카’를 인수한 중소 광고업체에 “회사를 넘기지 않으면 세무조사를 하게 하겠다”고 겁박할 정도로 ‘차은택 사단’은 안하무인이었다. 차은택은 대통령의 해외 순방 행사와 이벤트를 싹쓸이해 막대한 수익을 거뒀고, 이를 바탕으로 업계에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차은택은 중국에 있다가 지난 8일 귀국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정운호 나비효과

미르·K스포츠 재단의 문제점이 세간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TV조선을 통해서다. 이 매체는 안 전 수석이 미르재단에 돈을 지원할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지난 7월 특종 보도했다. 최순실 사건은 올 초 한국 사회를 ‘게이트 공화국’으로 몰고 간 정운호 사건,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 비리 의혹 사건 등과도 엮여 있다.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정운호 도박 사건 →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최유정 전관로비 사건 → 검사장 출신 변호사 홍만표 비리 사건 → 검사장 진경준의 넥슨 뇌물수수 사건 → 언론의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 비리 의혹 보도 → 우병우 비리 의혹 보도한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 대한 정권의 반격 → TV조선의 재반격’이라는 이른바 ‘정운호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TV조선 보도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조선일보 주필이 취재원으로부터 로비를 받았다는 점이 드러나 사퇴했고, 우병우 비리 의혹을 제기한 언론은 거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언론의 최순실 추적

하지만 지난 9월 이후 상황은 역전된다.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최순실 측근이라는 사실을 한겨레가 보도하고, 국정감사에서 청와대와 문체부가 두 재단 설립에 적극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어 정현식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63)이 재단 모금과 별도로 비덱에 80억원의 투자를 대기업에 강요했다는 보도(경향신문 10월18일자 1·3면)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두 재단을 통해 결국 최순실이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언론에서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독일 현지 취재를 포함한 최순실 비리 보도 경쟁을 벌였다. 이후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PC를 확보해 대통령의 연설문 등 각종 청와대 문서를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47·구속) 등을 통해 사전에 보고받았다는 특종 보도를 10월24일 터뜨리면서 박 대통령은 10월25일 대국민사과를 했다.

■정유라의 이대 입학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학 비리 의혹은 한국 사회 최후의 보루인 입시 공정성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이대는 정유라를 뽑기 위해 입시 요강을 바꾸고 입학처장이 “금메달을 딴 학생을 뽑으라”는 지시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경희 전 이대 총장(54)은 이 대학 개교 130년 이래 처음으로 중도 퇴진하는 불명예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며 정유라가 세상을 조롱하고 또래들을 멸시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떠돌고 있다.

■검찰로 넘어간 공

수사에 미온적이었던 검찰은 비덱이 드러난 후 수사팀을 증원했고, 태블릿PC로 전 국민의 공분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58·사법연수원 18기)을 본부장으로 하는 ‘최순실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고 대규모 수사팀을 만들었다. 독일과 중국으로 ‘도피’했던 최순실과 차은택도 차례차례 체포·구속했다. 검찰의 칼끝은 박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검찰과 김현웅 법무부 장관(57·16기)은 한때 “대통령은 수사대상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제는 “조만간 결정할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최순실에게는 뇌물(제3자 뇌물수수)죄 적용이 어렵다”고 했던 입장도 이제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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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민·유희곤 기자 riski@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