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년만에 깨어난 전함, '지식의 보물선' 되어 항해중

2016. 11. 7. 08:5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628년 8월10일 일요일 오후, 스웨덴 왕국의 스톡홀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했다. 세월 따라 전설처럼 되어버린 바사호를 현실로 일깨우고 사람들을 규합해 건져 올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는 아마추어 고고학자 안데르스 프란센이었다. 바사호와 같이 거대한 배를 건조하기 위해선 당시 유럽 각지에서 쓸만한 떡갈나무와 참나무를 끌어모아야 했다. 리사 몬손 바사박물관장은 인터뷰에서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방식도 끊임없이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바사호는 오래된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올해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이용한 전시물 등으로 이미 찾은 사람도 다시 찾고 싶게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몬손 박물관장은 함선 발굴과 관련한 조언에 대한 질문에 "발굴 직전에는 온 국민적 관심이 쏠리지만 이후 보존 처리에 돌입하면 금방 관심이 식고 예산을 조달하는 데 곤란을 겪기 쉽다. 관심이 모였을 때 향후 비용까지 고려한 계획을 수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바다와 우리의 미래
첫 출항때 침몰한 비운의 바사호
아마추어 고고학자 열정으로
1961년 인양,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존은 시간과의 끝없는 전쟁”
17년 보존재 바르고 10년 말려
과학 발전으로 기후 연구자료 활용
볼거리 이상의 함선으로 진화했다

지난달 13일 배 뒤편에서 촬영한 전함 ‘바사호’의 선체.

1628년 8월10일 일요일 오후, 스웨덴 왕국의 스톡홀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인파가 부둣가에 모였다. 이날은 북방의 ‘사자왕’이라고 불렸던 호전적인 왕 구스타브 2세가 특별한 애착을 갖고 만든 최강의 전함, ‘바사호’가 처음 바다로 나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배에는 선원 100여명과 남편이나 아버지로부터 승선 기회를 얻은 가족들이 배에 올라 부두 쪽으로 으스대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족들은 스톡홀름 앞바다의 요새까지만 항해를 만끽하고 내릴 예정이었다. 악대의 웅장한 행진곡 연주와 사람들의 함성으로 축제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인양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사호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비극을 맞았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첫 돌풍은 무사히 넘어갔다. 배가 좌현으로 기우뚱해서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했지만 결국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다음 작은 돌풍이 때렸을 때 대참사가 벌어졌다. 대포와 물자를 잔뜩 실은 거함 바사호는 다시 기울었고 축포를 쏘기 위해 열어둔 포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거워진 배는 더 기울었고 바닷물이 배 안에 차올랐다. 옆으로 기울어 가라앉기 시작한 배 안에서 선장은 하선을 명했고,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밑바닥 쪽에 있던 선원과 그 가족 30명은 결국 나오는 길을 못 찾고 배와 함께 수장됐다. 당시 스웨덴과 전쟁 중인 폴란드를 압박하러 발트해를 가로지를 예정이었던 바사호는 겨우 1300m가량 나아가고 꿈을 거둬야 했다.

이후 388년의 시간을 지나 지난달 13일 스톡홀름에서 바사호를 만났다. 거함은 변치 않는 위용으로 박물관에 들어선 이를 압도했다. 바닥에서 돛대 꼭대기까지 높이 52.5m, 함체의 높이(선미 기준) 19.3m로 5층 건물만한 나무배가 영화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선체의 길이는 47.5m, 뱃머리 대(바우스프릿)까지 포함한 총길이는 69m에 달했다. 보우스프릿에는 거친 파도를 넘어보지 못한 왕의 상징물, 사자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계의 바다를 향하지 못한 바사호가 40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인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있는 바탕에는 수많은 탐험가, 과학자, 고고학자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지난해 세계 최대 여행정보사이트인 ‘트립어드바이저’ 선정 세계 10대 박물관에 꼽힌 바사박물관에서 수중고고학 연구와 콘텐츠의 가치를 살폈다.

폴란드와 전쟁터에서 바사호의 합류를 손꼽아 기다리던 구스타브 2세는 어처구니없는 참사 소식에 대로하고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배에 남았다. 가까스로 탈출한 선장 쇠프링 한손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모두 철창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아무도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바사호는 64문의 대포와 300명의 전투원을 태울 정도로 당시 최강 화력으로 설계됐는데, 덕분에 물 밖의 선체가 너무 커졌고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복원력을 잃기 쉬운 상태였던 것이다. 설계자는 수많은 함선을 건조한 조선 명장 헨릭 히베르트손이었는데, 바사호가 완성되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출항에 앞서 위험을 알리는 징후는 여럿 있었지만 모두 무시되었다. 결정적 이유는 왕 자신이었다. 그야말로 가장 간절하게 이런 강력한 함선을 원했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라온 경고는 중간에서 모두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세월 따라 전설처럼 되어버린 바사호를 현실로 일깨우고 사람들을 규합해 건져 올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는 아마추어 고고학자 안데르스 프란센이었다. 1950년대 초부터 바사호에 주목한 그는 철저한 문헌 조사로 가라앉은 장소의 후보를 압축하고 무거운 추를 내려 바다 밑에 목재가 있는지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홀로 조사에 나섰다. 1956년 그는 드디어 바사호로 추정되는 검은 오크 목재를 발견한다. 그는 해군과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이는 위원회 설치와 인양 시도로 이어졌다. 바사호가 맞았다. 인양은 바사호 밑에 6개의 터널을 뚫고 쇠줄을 연결해서 들어 올리는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모두 1300명의 다이버가 2년에 걸쳐 이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1961년 4월24일, 바사호는 333년 만에 어두운 바닷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바사박물관의 프레드 호커 연구팀장은 지난달 1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차라리 인양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던 목재는 내부 구조에 수분이 채워지는데 공기 중으로 나오면 물이 빠지면서 붕괴하기 쉽다. 이를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이라는 물질로 대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폴리에틸렌글리콜은 무독성의 수용성 고분자화합물로 로션이나 샴푸 등으로 우리 삶에 친숙하게 쓰이는 물질이다. 인양된 바사호는 무려 17년 동안 이 물질을 바르고 다시 10년 동안 말리는 과정을 거쳤다.

바사호가 박물관에 들어왔다고 끝은 아니었다. 호커 팀장은 “보존은 끝없는 전쟁과도 같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바사호를 무너뜨릴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2000년 여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해에 관광객이 몰고 온 습기가 바사호에 침투하면서 목재에 남아 있던 유황이 녹아 배를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2002년 분석에 따르면, 바사호에 남아 있는 모든 황산 성분의 양은 2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연구팀은 바사호에 공기막을 씌워 습기를 막는 대책을 세웠다. 현재 바사호와 관람객 사이에는 아무 벽이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막으로 보호되고 있다. 현재 중점 프로젝트는 쇠못을 스테인리스 못으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배를 400년 가까이 지탱해온 쇠못이 부식되면서 주변 목재를 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난해부터 교체 작업에 들어갔다. 총 5천여개 가운데 현재까지 3천개 넘는 못이 교체됐다.

한국은 거북선 인양 추진 중

이렇게 돌아온 바사호는 지식의 보따리를 싣고 있다. 호커 팀장은 “수중 유물은 쉽게 소실되거나 흩어지기 마련인 육지 유물이 보여줄 수 없는 독특한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바사호와 같이 거대한 배를 건조하기 위해선 당시 유럽 각지에서 쓸만한 떡갈나무와 참나무를 끌어모아야 했다. 선체의 목재 나이테 등을 관찰하면 당시 유럽의 기후와 식생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다. 연구팀은 배에서 발견한 유골과 실린 물자들을 분석해 북유럽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과학적 탐구는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현재진행형이다. 호커 팀장은 “예를 들어, 최근 유전자 연구기법이 발전하면서 유골에 이 기법을 적용해 당시 인종의 조상을 밝혀내는 새로운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우리가 연구와 보존을 동시에 중시하는 이유는 미래에 새 기법과 분석이 가능할지 모르므로 이를 위해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리사 몬손 바사박물관장은 인터뷰에서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방식도 끊임없이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바사호는 오래된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올해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이용한 전시물 등으로 이미 찾은 사람도 다시 찾고 싶게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신안선 발굴 40주년을 맞아 해양 문화재 발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큰 목표라면 ‘거북선’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양순석 학예연구사는 “문헌으로 보면 남해 바닥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몬손 박물관장은 함선 발굴과 관련한 조언에 대한 질문에 “발굴 직전에는 온 국민적 관심이 쏠리지만 이후 보존 처리에 돌입하면 금방 관심이 식고 예산을 조달하는 데 곤란을 겪기 쉽다. 관심이 모였을 때 향후 비용까지 고려한 계획을 수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톡홀름/글·사진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민중은 루비콘강을 건넜다…결론은 단 하나, 하야!
광화문 집회 뒤 난장판?…박원순 “국민 음해하는 날조 사진”
‘박근혜 부역자 인명사전’ 시민의 힘으로 편찬한다
‘정치적 유인물 안 된다’며 <한겨레> 뺏은 경찰
[카드뉴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패러디 ‘폭발’

▶ 발랄한 전복을 꿈꾸는 정치 놀이터 [정치BAR]
▶ 콕콕 짚어주는 [한겨레 카드뉴스][사진으로 뉴스 따라잡기]
▶ 지금 여기 [오늘의 사설·칼럼][한겨레 그림판][영상뉴스]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