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573억 뜯은 가족 보이스피싱단 무너뜨린 '처남의 배신'

김수경 기자 2016. 11.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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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3만3000명 울린 기업형 보이스피싱 조직에 무슨 일이 꼬리 자르기식 운영 '콜센터' 수십개 만들어 처남·처제 등에 맡기고 들키면 그 사람이 총대.. 남은 가족은 생계 지원

9년 동안 3만3000여명을 속여 573억원을 가로챈 전화 금융 사기(보이스피싱) 조직이 최근 경찰에 붙잡혔다. 단일 조직으로는 최대 액수다. 이들은 서울 명동, 서초동, 역삼동에 보이스피싱 사무실 10여개를 두고 조직을 운영했다. 회장, 사장, 과장 등 직함을 사용하며 기업형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맨 처음엔 휴대전화 통신비를 50% 할인해 준다며 회원 가입을 유도하고 가입한 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가입 시 입금되지 않은 금액을 내라며 100만원 안팎의 금액 결제를 유도하는 수법을 썼다.

특이한 점은 이들 조직이 가족 기반이었다는 사실이다. 46명 중 구속된 12명엔 총책 최모(50)씨와 최씨 아내 김모(50)씨를 비롯한 일가족 5명이 포함됐다. 최씨 가족은 '콜센터 국장', '자금관리과장' 같은 직함을 만들어 맡고 있었다. 이들은 또 범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법인 수십개를 만들어 가짜 회사를 운영했고, 피해자들로부터 불만이 밀려들면 해당 법인과 사무실 전화번호를 없애버리는 방법을 썼다. 이들은 그렇게 9년 동안이나 수사망을 피해 조직을 유지해왔다.

일가족 5명이 이끈 보이스피싱

보이스피싱 총책 최씨는 지난 2000년부터 전화를 걸어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통신판매 대리점을 운영했다. 방송사나 유명 영어학원에서 만든 영어회화 교재와 전화 통화 쿠폰 등을 팔았다.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비슷한 일을 하던 아내 김씨를 만나 결혼도 했다. 결혼한 뒤엔 아내의 업체와 자신의 대리점을 합쳤다. 하지만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화 대신 인터넷으로 영어 교재를 샀고, 통신사에서 무제한 요금제를 출시하면서 전화 통화 쿠폰도 팔리지 않았다.

적자를 보던 최씨에겐 그동안 전화 판매 영업을 하며 모아둔 개인정보가 남아있었다. 최씨는 이 개인정보를 토대로 지난 2008년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가짜 콜센터를 두고 통신회사 멤버십센터를 사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직원들은 최씨 지시에 따라 기존 고객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고객들은 이름, 생년월일, 휴대전화 번호와 카드사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사기꾼들에게 의심을 품지 않았다.

최씨의 보이스피싱 수법은 중국인들이 끼어 있는 조직의 수법보다 훨씬 치밀했다. 1차 전화는 미끼였다. "사용하지 않아 누적된 포인트를 백화점 상품권으로 교환해주겠다"고 말을 꺼낸 뒤 "추가 혜택 기간이라 휴대전화 요금 50% 할인이 가능하다"며 고객이 거래하는 카드사를 알아냈다. 며칠 뒤 두 번째 전화를 걸어 '무료 통화 서비스'를 주겠다고 속였다. 콜센터 직원들은 "66만~160만원만 내면 추가 비용 없이 가족 4명까지 휴대전화 요금을 3년간 50% 할인해주겠다"며 가입을 유도했다. 자동차보험 할인, 여행상품 할인 등 기타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때 가입에 응한 사람들로부터 신용카드 번호와 유효 기간을 묻고 자신들이 '○○텔레콤' 등으로 만든 법인 앞으로 일정 금액을 결제하도록 유도했다. 비밀번호 같은 민감한 정보는 물을 필요 없었다. 전화판매업으로 등록할 경우 서명 없이 카드번호와 유효 기간만으로도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6개월~1년 뒤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어 "3년 치 서비스 요금 가운데 1년 치만 납부한 상태"라며 "나머지 요금을 내면 2년 뒤에 전액 환급된다"며 추가 결제를 요구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가입한다고 말했던 서비스이기 때문에 보이스피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순순히 나머지 금액을 결제했다. 재결제한 사람에겐 이후에도 6개월~1년마다 한 번씩 전화를 걸어 매번 미납 요금을 요구하는 수법을 썼다. 피해자들이 결제를 거부하면 이들은 "미납 요금이라 법원에서 강제집행을 할 수 있고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경찰이 카드 결제 내역으로 파악한 피해자만 총 3만3740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속은 강모(52)씨는 2008년 가입 후 16회에 걸쳐 1700만원을 뜯겼다. 피해자 최모(55)씨에겐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멤버십 미납 요금이 있다"며 납부를 요구해 160만원을 가로챘다. 이들은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수기로 작성했는데, 몇몇 고객 카드엔 '울먹이면서 전화함', '의심 많음' 등 특징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9년간 573억원 뜯어내

이들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경찰 조사에서 이들이 스스로 밝힌 월급은 300만~500만원 정도다. 하지만 억대의 외제차를 몰고 각종 호화 생활을 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경찰은 피해자들로부터 가로챈 573억원의 대부분이 이들 가족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업이 커지자 큰처남 김모(49)씨가 가담했고 이후엔 처제 김모(46)씨가, 2010년엔 큰처남의 처남인 고모(38)씨도 동업했다. 실제 통신판매 대리업을 하는 것처럼 사무실을 차린 뒤 사무실을 명동에서 강남으로 확장·이전했고 최씨는 회장 직함을 달았다. 아내 김씨는 사장 역할을 맡았다. 전화를 걸어 사기를 치는 이른바 '콜센터' 20여곳을 뒀고 이곳에서 일한 사람 수만 100여명에 달했다. 경찰은 이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이들 상당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이들은 경찰에서 "뭔가 거짓이 섞인 일을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보이스피싱인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최씨 가족들은 요직을 맡았다. 큰처남에겐 콜센터 4곳을 담당하도록 했고 처제에게는 콜센터 3곳과 전화 거는 역할을 맡은 20여명을 관리토록 했다. 큰처남의 처남에게도 콜센터 하나를 맡겼다. 각 콜센터는 최씨 부부의 법인(본사)과 아무 관계 없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전혀 다른 이름의 법인으로 등록했다.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부하들은 모두 가명을 쓰면서 통신회사 대리점 직원 행세를 했다. 콜센터 한 곳에 피해자들의 불만 전화가 접수되면 법인을 없애고 새 법인을 만들었다. 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한 꼼수였다. 이렇게 이들이 만들었다 없앤 법인만 40여개에 달했다.

가족을 끌어들이면서 최씨 부부의 사업은 수사망을 피할 수 있게 진화했다. 콜센터 여러 개 중 하나가 들통나더라도 전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꼬리 자르기 식으로 운영한 것이다. 수사를 받아야 하면 처남이나 처제 등 가족 중 한 명이 총대를 멨고 조사를 받더라도 총책인 최씨를 비롯한 조직의 몸통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남은 가족들이 운영을 계속하면서 조사받는 가족의 식구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라며 "가족이라는 관계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집단 내분으로 꼬리 잡힌 사기극

이들의 사기극은 최씨 일가 부하의 배신에서 비롯됐다. 어느 날 최씨 큰처남의 처남 고씨 밑에서 일하던 부하 강모(37)씨가 그간 터득한 '노하우'를 토대로 몰래 보이스피싱 사무실을 차려 딴주머니를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기의 밑천이 되는 개인정보는 대부분 최씨 일당 것과 중복됐다. 사기 칠 대상이 부족해진 강씨는 최씨 일당의 '사업 밑천'을 독식할 속셈으로 최씨 일당의 사기 행각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 결과 작년 11월 고씨와 부하 41명이 서울 송파경찰서에 붙잡혀 그중 고씨를 비롯한 5명이 구속됐다. 당시 고씨가 주도한 피해 금액만 24억원이 넘었고 피해자도 1600여명에 달했다. 고씨는 그러나 총책 최씨를 배신하지 않고 경찰에서 "폐업한 멤버십 회사에서 개인정보를 구매했다"며 배후를 숨겼다. 결국 최씨라는 몸통은 드러나지 않은 채 고씨 선에서 꼬리가 잘렸다.

하지만 고씨 구속 기간이 1년가량으로 길어지고 경찰이 처남과 처제까지 조사하기 시작하자 내분이 생겼다. 9년간의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한 다툼이었다. 최씨가 조직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들 몰래 마카오에서 도박을 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가족 간의 틈이 더욱 벌어졌다. 결국 지난 7월 구속돼 먼저 조사를 받던 처남 김씨에 의해 최씨 부부가 이 사기극의 총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9년간 이어온 가족 기업형 보이스피싱 조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을 1년에 걸쳐 수사한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고씨 밑에서 일하던 강씨처럼 노하우를 익히고 나온 사람들이 계속 새로운 사기단을 만드는 정황이 포착됐다"며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달 26일 이들을 모두 검찰에 송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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