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속전속결 '하나회' 척결..후임 장성 '별' 모자라 다른 사람 모자서 떼내 달아줘

강태화.위문희 2016. 11. 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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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석화 YS"별건으로라도 현철이 구속" 결단경질 장관에 통보하기 전 후임 발표수족 자른 DJ홍걸씨 비리 부속실장 미국 보내 확인혐의 보고하자 "수사 받으라 하시오"정면돌파 노무현최도술 총무비서관 비리 불거지자"국민에게 재신임 묻겠다" 깜짝 발표심사숙고 MB광우병 사태 때 비서진 대폭 교체"국정 공백 우려" 장관은 3명만 바꿔

역대 대통령, 측근 비리 등 위기 어떻게 대처했나
역대 정부의 공통점은 정권 말 측근 비리로 인해 예외 없이 레임덕(권력누수)을 겪었다는 것이다. 5년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됐지만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은 각기 달랐다. 위기에 처했던 전 대통령들의 고민과 결단을 지켜본 측근 인사들의 말을 통해 당시 상황을 되짚어봤다.◆아들 앞에선 흔들렸던 YS=1997년 1월. 한보그룹 부도 사태가 터졌다. 자기자본 2200억원에 불과한 한보가 5조7000억원의 대출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김영삼(YS)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배후로 떠올랐다.
검찰은 그해 2월 ‘소통령’으로 불렸던 현철씨를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현철씨는 5일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YS는 “이유야 어떻든 모든 것은 저의 부덕의 결과로 대통령인 저의 책임이다. 만일 제 자식이 이번 일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 당연히 응분의 사법적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이라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3월 현철씨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그가 다니던 병원의 CCTV에서 YTN 사장 선임에 현철씨가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악화된 여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YS는 “별건으로라도 현철이를 구속시켜라”는 결단을 내렸다. 이어 내각 총사퇴 카드를 꺼내 개각을 단행했지만 민심을 돌리진 못했다. 공교롭게도 현철씨가 물러난 뒤 전광석화로 불리던 YS의 국정 대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결국 임기 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YS의 지지율은 6%까지 추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4일 기록한 지지율 5% 전까지는 역대 최저였다.

평생 YS를 보좌했던 김기수 전 수행실장은 “YS는 외동이라 측근이라곤 아들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들한테 줄을 대려는 사람이 많았다”며 “박 대통령도 부모님을 다 먼저 보내고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청와대를 출입한다는 여자(최순실씨)에게 온갖 사람들이 꼬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그래도 YS는 ‘인사가 만사’라는 철학에 따라 위기를 인사로 극복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황이 발생하면 경질될 당사자에게 통보하기도 전에 후임자를 발표한 적도 많았다”며 “김덕 통일부 장관이나 한완상 부총리는 자신의 경질 소식을 청와대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로 들었을 정도였다. 당시 청와대 사람들은 모두 주머니에 항상 사표를 들고 다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YS 임기 초기 단행된 ‘하나회’ 척결 과정도 전했다. 김 전 실장은 “하나회 관련자를 다 쳐낸 직후 후임자를 청와대로 바로 불렀는데 어깨에 달아줄 ‘별’이 준비되지 않았다. 내가 ‘각하, 5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달아줄 별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며 “어쩔 수 없이 국방부에서 다른 사람의 모자에 달려 있던 별을 떼어 임명자에게 달아주기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박 대통령에 대해선 평가하지 않겠다”면서도 “아날로그 시대였던 그때에도 국민 여론에 앞서 인사라도 단행했었는데 모바일과 디지털 시대에는 여론이 더 빨리 움직이는데…”라고 말했다.

◆‘홍삼 트리오’ 비리에 무뎌진 DJ 칼날=2000년부터 김대중(DJ) 대통령은 ‘게이트 정국’에 휘말렸다. 2300억원대 불법 대출과 주가 조작으로 경제계를 뒤흔든 ‘진승현 게이트’, 680억원대 횡령이 적발된 ‘이용호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 등이 잇따라 터졌다. 그때마다 ‘홍삼 트리오’로 불렸던 DJ의 세 아들이 줄줄이 연루됐다.
그러나 DJ의 결단은 2002년 5월에야 이뤄졌다. DJ는 집권 마지막 해인 2002년 5월 6일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함께 아들 문제에 대해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는 모두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해 6월 21일 둘째 아들 홍업씨가 구속되자 재차 사과했다.

이희호 여사는 최근 한 일간지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신문을 읽기가 힘들었어요. 국민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지요. 남편은 일정이 많은데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내가 죄인이 된 것같이 괴로웠지요”라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당시 청와대 부속실장으로 DJ를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은 “창피한 말이지만 솔직히 당시 청와대에서도 친인척 관리에 구멍이 나 있었다”며 “아무도 아들 비리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민정수석이나 검찰도 대통령에게 사실관계를 묻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DJ는 최측근이던 김 의원을 비밀리에 홍걸씨에게 보냈다.

김 의원은 본지에 “홍걸씨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만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바로 귀국했다”며 “DJ에게 ‘청탁 유무와 무관하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검찰 수사가 불가피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의 보고에 DJ는 크게 낙담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 뒤에야 “수사에 성실히 응하라고 하시오. 죄가 있으면 받으라 하시오”라는 말이 돌아왔다.

DJ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박지원 비서실장을 제외한 청와대 수석들을 대부분 관료 출신으로 교체했다. 장관 인사도 부처 출신의 차관들을 그대로 승진시킨 사례가 많았다. 김 의원은 “수족을 모두 잘라내면서도 남북 관계 관리의 공백을 없애기 위해 외교특보직을 신설했다. 그 자리를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씨에게 맡겼다”며 “이 때문에 2002년 월드컵대회 중 발생한 연평해전 때 북한과 핫라인으로 접촉하면서 확전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선 “안보 등에선 국정 공백을 없애야 하지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비선에 동조한 모든 세력을 발본색원해 처벌하지 않고는 기강을 다시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다이너마이트는 묻을수록 크게 터진다”=2003년 10월 10일.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취임한 지 1년도 안 됐던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 검찰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깜짝 발표를 했다. 청와대 참모진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대통령 한 사람이 중간에 희생하더라도 한국의 정치가 바로 갈 수 있으면 그것은 임기 5년 다 채우는 것보다 더 큰 진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당시는 대선자금 수사로 정국이 요동치던 시점이었다. 20년간 노 전 대통령을 보좌해 왔던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그러나 검찰이 한나라당이 대기업으로부터 800억원 넘는 불법자금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차떼기당’으로 몰린 한나라당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무리수를 둔 끝에 2004년 17대 총선에서 패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입’을 담당했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대통령이 그날 아침에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히자 모든 참모가 말렸다”며 “노 전 대통령은 ‘리더십에 손상이 간 만큼 지체 없이 해야 한다’는 고집을 굳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진은 당시 총사퇴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이건 참모진이 사표 낼 일이 아니라 내가 책임질 일”이라며 만류했다. 윤 전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은 항상 ‘정직이 최선의 방법이고 책임은 리더인 내가 져야 한다’는 말을 했다”며 “국정원의 불법 도청 의혹 때도 ‘덮고 가자’는 건의에 ‘다이너마이트는 깊이 묻을수록 폭발력이 커진다’며 반대했다”고 회상했다.

2005년 4·30 재·보선에서 완패한 후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이 무너지자 그해 7월 노 전 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 지명권, 내각 구성권 등을 한나라당에 주는 조건으로 대연정을 제안했다. 노 전 대통령은 “권력을 통째로 내놓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말 한마디로 나눠주는 권력은 받을 의사가 조금도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대해 윤 전 대변인은 “비록 실패했지만 지역구도 해소는 노 전 대통령의 필생의 목표였다”며 “권력을 내주더라도 반드시 이루려고 모든 걸 걸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도 집권 4년 차에 터진 ‘봉하대군’으로 불리던 친형 건평씨가 비리에 연루되며 레임덕을 맞았다. 열린우리당도 탈당했다. 노 대통령은 퇴임 후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측근들이 잇따라 구속되자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YS 벤치마킹했지만 신중한 MB=“오늘은 꼭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2008년 6월. 류우익 당시 대통령실장(현 비서실장 격)이 MB에게 건넨 말이다.
당시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광우병 사태’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이명박 OUT’을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언론과 정치권은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MB는 이미 두 차례의 사과회견을 했지만 민심은 수습되지 않았다. 망설이던 MB는 류 실장의 마지막 결단 촉구를 듣고야 참모진 개편을 수용했다.

당시 청와대 수석 중 자리를 지킨 사람은 이동관 홍보수석과 국정기획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박재완 정무수석뿐이었다. 그러나 내각에선 3명만 교체해 비판을 받았다. 이 전 수석은 “대규모 개각도 고려했지만 집권 초 국정 공백을 감안했다. 여론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해 청와대에 있던 수족을 모두 잘라 버렸던 것”이라고 전했다.

MB는 인사를 통한 국면 전환에 소극적이었다. 한마디로 심사숙고형이다. MB는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YS를 여러모로 벤치마킹했지만 YS의 전광석화 같은 인사와는 정반대였다. MB의 인사관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도 잘 드러나 있다.

“과거 정권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면 분위기 전환용으로 개각을 단행하곤 했다. 박정희 정부 이후 장관 평균 임기가 1년에 불과한 잘못된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 기업도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기 힘든데 장관 인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당시 청와대에선 ‘인사 얘기가 나오면 실제 인사는 최소 두 달 후에 이뤄진다’는 말이 정설이었다. 당시 청와대 고위직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인사 명단을 3배수로 올리면 단번에 결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확신이 들지 않으면 ‘좀 더 고민해 보자’고 말했고 한 자리를 놓고도 그런 일이 3~4차례 반복된 적도 숱하게 많았다”고 술회했다. 또 다른 참모는 “위기 때마다 YS의 한 템포 빠른 인사 스타일을 조언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인사를 통한 국면 전환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대국민 사과도 늦었다. MB는 재임 중 총 여섯 차례 사과를 했다. 광우병 정국에서 두 번, 세종시 공약 수정 제안과 동남권 신공항 공약 철회 때를 포함해 친형인 이상득(SD) 전 국회부의장 등 측근 비리로 두 번 사과했다. 또 다른 청와대 출신 인사는 “MB는 일을 열심히 하면 국민이 마땅히 평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국면 전환용 인사나 대국민 사과와 같은 이벤트를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정 상황이 어려울 땐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MB는 집권 4년 차에 SD가 연루된 ‘영포(경북 영일-포항) 게이트’와 ‘저축은행 비리 사태’를 맞았다. MB는 “저 자신도 국민도 분노에 앞서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탈당하지 않았다. 1987년 개헌 이후 대통령 중 현직인 박 대통령을 제외하고 퇴임 때까지 당적을 유지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S BOX] YS 1년차에 83%, 외환위기 후 6% 지지율 극과 극

「역대 대통령의 지지도는 처음에는 높다가 갈수록 낮아지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였다. 임기 초기 최고 지지율을 보인 뒤 2년차까지는 40~50%대, 3년차부터 하락세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극과 극의 지지율을 보였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YS의 1993년 취임 1년차 최고 지지율은 83%였다. 과감한 개혁 행보에 지지 여론이 솟구쳤다. 그러나 아들 현철씨가 연루된 한보 비리와 외환위기를 거치며 지지율은 집권 마지막 해 6%로 급락했다. 4일 박근혜 대통령이 기록한 5% 지지율 이전까지 역대 최저치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1분기를 71%의 지지율로 시작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하강곡선을 이어간 끝에 5년차인 2002년 4분기에는 24%로 떨어졌다. 그해 DJ의 아들 홍업·홍걸씨가 구속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1분기에 60%의 지지율로 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첫해부터 지지율이 40%(2분기)→29%(3분기)→22%(4분기)로 떨어졌다. 재임 2~3년차에는 탄핵 등을 거치면서 지지율이 20~30%대에서 등락을 거듭한 끝에 4년차 4분기에는 12%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지지율은 이례적으로 집권 마지막 해에 27%로 상승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52% 지지율로 출발했지만 쇠고기 파동을 겪으며 취임 첫해 2분기 지지율이 21%까지 떨어졌다. 이후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3년차 2분기에는 49%까지 지지율이 올랐다. MB의 마지막 해 지지율은 23%였다.

위문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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