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성폭력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까

박은하 기자 2016. 10. 2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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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하나의 유령이 예술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성폭력이란 유령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학, 만화, 미술, 음악 등 문야를 막론한다. 유령은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서만 나온다.
서울의 한 4년제 대학 문학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김소연씨(가명)는 최근 시 습작 수업에서 교수로부터 공개적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기분이 좋기는커녕 당혹스러웠다. 교수는 문단에서 인정받는 유명 평론가였다. 김씨는 “교수님이 내 시를 성(性)적인 의미로 해석하는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유명 평론가이니 나도 모르는 내 시의 의미를 읽어낸 것일까. 김씨는 고민을 여자 선배에게 털어놨다. 선배는 “생각해보면 합평(합동비평) 시간에 여학생의 작품은 성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하고, 또 성적인 은유를 담아야 좋게 평가받는 것 같다”고 김씨에게 답했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성적 농담인지 비평인지 경계가 모호했던 이야기도 있었고, 강의실 내에서 느낀 이런 분위기도 성폭력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폭로했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두려워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문학으로서 평가받기 전에 성적 대상으로 평가받는 것 같은 분위기가 불쾌하지만 차분하게 말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이러다 나쁜 일 당하면 그냥 확 터뜨려버리지 않을까요.”

하나의 유령이 예술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성폭력이라는 유령이다. 문학, 만화, 미술, 음악 등 문야를 막론한다. 스승과 제자, 미성년자 작가 지망생과 등단한 문인, 작가와 팬, 팬 모임에서 만나는 미성년자와 중년 혹은 대학생 남성, 미술관장과 큐레이터, 유명 작가와 계약직 큐레이터 등 관계는 다양하지만 전형적이다. 젊은 남성 피해자도 있지만 대다수는 10대 후반~20대 초반 젊은 여성과 나이 든 남성 사이에서 이뤄진다. 여성 작가가 팬들 사이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방조하고 만화 소재로까지 사용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유령은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서만 나온다.

트위터에서 ‘#00계_내_성폭력’이란 이름의 해시태그를 달고 문화예술 각계 분야의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잘못된 관행, 등단 비리까지 비화 성폭력범으로 지목된 이들 역시 SNS나 에버노트 등 온라인 공간에서 답한다. 술자리에서 여성 출판인들을 ‘○○번째 은교’라 부르며 희롱하고 신체를 만졌다는 박범신 작가는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나이 든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라는 사과문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더 큰 비난을 받고 삭제했다. 배용제, 박진성, 배삼웅 시인 등은 에버노트에 사과했다. 트위터에서 미성년자 성폭력 방조 의혹으로 고발된 만화가 이자혜씨는 이를 부인하는 사과문을 에버노트에 올렸다가 삭제했다. 일방적 폭로를 언론이 받아쓰고, 비난여론이 빗발치고, 사과하거나 활동을 중단하고, 성폭력범으로 이름이 오르는 순간 출간 계약이 취소되거나 온라인 등에 기존에 나간 작품이 회수되는 등의 조치가 이어진다. 일방적 폭로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예술계 내 잘못된 관행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학의 예술 관련 학과에 가보세요. 학생들은 거의 여성인데 교수들은 거의 남성이에요. 함께 습작 발표회를 하는데 창녀나 섹스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어요. 여학생끼리는 화들짝 놀라요. 표현부터 해서, 꼭 문학에서 여자를 이렇게 묘사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대부분 남성인 교수들은 잘 썼다고 칭찬하고, 여기에 대해 비평할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아요. 이런 게 반복되면 위축되는 거죠. 심지어 ‘등단’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그 교수잖아요.” 시인 지망생인 김소연씨가 말을 이었다.

문단 내 성폭력은 ‘등단 비리’ 문제로 비화된 상태다. 10월 28일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2015∼2016년 초반 문예지인 <현대시학> 편집위원인 권혁웅 시인 겸 평론가가 선배 시인이나 주간의 부탁을 받고 특정인을 등단시켜줬다고 발언했다. <현대시학>에서 운영하는 권 시인의 강좌를 들은 적 있다는 이모씨가 폭로한 내용이다. 권 시인은 이씨의 폭로 다음날인 10월 27일 오후 답글 형식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편집위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남자 지망생은 등단하고 나면 동료가 되지만 여자 지망생은 계속 선배 문인들의 뮤즈(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지 동료로 인정받지 못한다. 비평의 죽음도 흔히 문제가 되지만 비평 자체가 굉장히 남성 중심적이다. 대학이나 각종 문예강좌에서 수업을 들을 때부터 익숙해지는 일이다.” 원래는 문인 지망이었다가 출판계로 들어간 여성편집자 ㄱ씨의 말이다. ㄱ씨는 온라인에서 SNS 계정을 개설해 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을 결심하는 여성들에게 상담을 하고 법적 자문을 하고 있다. ㄱ씨는 “성추행을 예술가의 낭만 등으로 포장하고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 문화가 지망생 단계부터 존재해 고착화된다”며 “애초에 이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데다 등단문제 등이 얽혀 있어 다른 종류의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노동 여건이 단서로 작용 예술계의 고용관행이 사건을 더 나쁘게 만들고 있다. 온라인에서 폭로전이 일기 전 네이버에서 작품을 연재하던 만화가 정철씨는 어시스트(조수) 성추행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전진석씨도 어시스트 성추행 및 계약문제로 분쟁을 빚고 한국만화가협회에서 제명됐다. 전씨는 성추행과 관련해서는 내연관계였지 성추행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함영준 일민미술관 큐레이터는 작가를 상대로 한 과거 성추행 사실이 SNS에 폭로돼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가 여성작가를 성추행했다며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폭로도 올라와 있다. 권혁빈 예술인소셜유니온 사무국장은 “예술노동자의 불안정한 지위가 원인이다. 같은 약점이 있을 때, 남성 예술인의 경우 일자리를 빼앗는 방식으로, 여성 예술인의 경우 성적 괴롭힘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무정부 상태’에서 방치되는 예술계의 불안전한 노동여건이 성폭력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연일 이어지는 폭로전 역시 무정부 상태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트위터에서 성추행당한 사실을 폭로한 적이 있는 ㄴ씨는 “법이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니 익명 폭로에 기댄다. 솔직히 일종의 복수심도 있다. 그러나 법적 절차를 밟을 경우 힘 있는 작가들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하거나 유명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을 지연시키고 재판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 피해자들이 더 망가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우리 사회는 빨리 여론을 동원해 사과시키는 것 이상의 효과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10대 때 당한 성추행 폭로를 준비하고 있는 20대 초반인 ㄷ씨가 말했다. “10대 때 지방에 살아서 문학인, 작가 이런 사람들을 볼 기회가 좀처럼 드물었다. 지역 문화행사에 온 작가를 동경해서 사적으로 만났다 성추행을 당했다. 부모님은 수치스러우니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 내가 당한 일이 부당하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전 일이라 법적으로 어차피 해결할 수도 없고 증거도 없다. 하지만 나 같은 피해자가 더 생겨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할 경우의 대응책 등을 더 점검하는 중이다.” 다만 온라인을 통한 폭로라도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고 경제력이 강하면 무력하다. 상대방이 적극 명예훼손 소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법은 만13세 미만 미성년자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인 간, 사인 간에서 상대적 약자가 당하는 일에는 쉽게 개입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폭로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장 연구위원은 “현재의 시점에서 (온라인 폭로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시킨다는 긍정적 역할이 있다. 단, 성폭력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면 언젠가 공동체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 연구위원은 “성범죄와 관해서는 사법체계 역시 SNS 폭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피의자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사회적으로 격리하고, 전자발찌를 채우는 등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배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현재 폭로로 진행되는 단죄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성폭력범으로 찍히면 공동체에서 제거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게 부인하고, 은폐하고, 피해자를 몰아가는 문제가 생긴다. 성폭력 문제에 사과하고 공동체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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