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의 생생토크] "광주에 AFKN 나왔다면 제 꿈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입력 2016. 10. 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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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아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인터뷰.. "넥센 입단 아들 정후, 잘 성장해 프로 선수 된 게 대견"

1993년 프로야구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형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중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과 해태 타이거즈(KIA)의 이종범은 프로 데뷔 첫해부터 리그를 지배하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양준혁이 타율 0.341에 130안타 23홈런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신인왕에 오르자, 이종범은 73개의 도루를 달성하며 ‘바람의 아들’이란 별명을 안고 팀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더욱이 이종범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의 활약 덕분에 그가 은퇴할 즈음엔 한·일 통산 2000안타 돌파, 221홈런, 563도루라는 기록을 남기고 떠날 수 있었다.

2012년 4월,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발표하는 바람에 당시 선동열 감독과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그는 야구팬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는 은퇴식을 치르며 눈물로 이별을 고했다. 이후 김응용 감독의 부름에 한화 이글스 코치로 2년을 보내다 지금은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종범 해설위원을 만났다.

이종범 위원은 최근 자신보다 아들과 관련해서 주목을 받았다. 큰아들 이정후(휘문고 3)가 올 시즌 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됐기 때문이다. 이정후는 이종범의 아들이란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야구를 시작하고 유망주로 성장하면서부턴 아버지의 별명을 빗대 ‘바람의 손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들이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된 모습이 마냥 대견하기만 했던 이종범. 인터뷰는 이정후 얘기로 먼저 풀어나갔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 MBC 해설위원 ⓒ 이영미제공

“사람들 시선 의식해 정후 경기 보러 못 가”

아버지의 은퇴식에서 시구 시타를 했던 아들이 어느새 프로 선수로 뛰게 됐네요. 감흥이 좀 남다를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사실 전 정후에게 뭔가를 해 준 게 없어요. 한창 성장할 때는 제가 야구하느라 바빴고, 야구 그만두고 쉴 만하니까 다시 코치로 2년간 집을 비워야 했죠. 이후엔 해설한다고 또 정신없이 지냈고요. 지금의 정후는 아내의 뒷바라지가 90% 이상이에요. 전 오히려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서 정후가 뛰는 야구 경기를 보러 갈 수도 없었어요. 그래도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잘 성장해서 프로 선수가 됐다는 게 대견합니다. 도와준 게 없어 미안하기도 하고요.”

야수인 이정후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될 거라곤 대부분 예상 못했을 겁니다. 투수가 1차 지명되는 사례가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이정후는 계약금 2억원에 넥센과 입단계약을 맺었습니다.(185cm, 78kg의 체격을 지닌 이정후는 빠른 배트 스피드와 부드러운 스윙으로 다양한 구종에 대한 대처가 가능하고, 고교선수답지 않은 수준급 컨택 능력을 보유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휘문고 입학 후 1학년 때부터 많은 경기에 출전했고, 청소년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이제 ‘동네 산’ 하나 넘은 거죠. 드래프트 당일엔 마치 수험생 부모의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정후는 아직 자신이 프로 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넥센 유니폼을 입어보라고 했더니 유니폼 입고선 휘문고 유니폼과 느낌이 다르다고 말하더군요. 그겁니다. 아마추어 야구선수가 아닌 프로 선수가 된다는 건 유니폼을 입으면서도 차이가 나거든요. 자기도 모르는 책임감이 생기니까요. 그걸 느끼게 해 주고 싶었어요.”

 

말씀대로 이제 ‘동네 산’ 하나 넘은 거네요. 앞으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잘 달려왔어요. 스스로 노력하면서 말이죠. 이제부턴 제대로 붙어봐야 합니다. 실력이 쟁쟁한 선배들과 경쟁하면서 직접 느껴야 해요. 지금은 제가 어떤 말을 해 줘도 뜬구름 잡듯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자기가 직접 부딪치고 깨지고 넘어지면서 배워가야죠. 정후를 보면서 나이 어린 친구들의 세계나 마인드에 대해 잘 알게 됐어요. 제가 야구할 때는 못 먹고 살아서 가난이 한이 됐던 시절입니다. 오로지 돈을 벌려고 야구를 했어요. 지금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야구를 해요. 선배들의 구타도 없고 대우받고 즐기면서 야구를 하다 보니 우리 때의 간절한 마인드를 요구하기 어려워요. 그걸 프로에서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이제부턴 정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거죠.”

 

이종범의 아들이란 출신 성분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도움이 되기보단 정후 혼자 속앓이했던 게 더 많지 않았을까요? 저한테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종범 아들이란 사실 때문에 더 욕먹고 혼나고 더 많은 시선을 받으며 성장했어요. 누구 아들이란 타이틀로 도움을 받은 적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래서 더 힘든 점도 있었을 겁니다. 앞으로 정후는 성적을 잘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사의 댓글을 통해 나타나는 팬들의 비난과 욕을 먹는 부분에 대해서도 의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은퇴 후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

은퇴하고 나서 가장 좋았던 게 뭐예요. 더 이상 야구를 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상쇄할 만큼 좋았던 게 있었는지 궁금해요.

“욕 안 먹는 거요? 더 이상 경기 내용에 대한 비난을, 타율 등 성적에 대해 욕먹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이 제 어깨를, 심장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줬어요. 그땐 몰랐는데 은퇴하고 나니 내가 그런 점들에 대해 아주 큰 부담을 갖고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담이겠지만요.”

야구에선 ‘바람의 전설’ ‘종범 신’으로 추앙받던 분이었습니다. 은퇴 후 사회로 나와 보니 어떠하던가요. 

“나름 선수생활을 하면서 은퇴 이후를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준비한 것과 현실은 천양지차였어요.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더라고요.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제 성격이 강하다 보니까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예요. 결국 김응용 감독님의 부름에 한화 코치로 가게 됐지만 선수생활은 물론 코치·해설을 하고 있는 지금도 생존경쟁을 벌이는 것 같습니다.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상황인 거죠.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런 조언을 많이 해요. 준비 많이 하라고. 그리고 어디 가서 남 험담하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만 전하고 남을 헐뜯지 말라고요.”

기아 타이거즈 선수 시절의 이종범 해설위원 © 시사저널 포토

은퇴 후 4년이란 시간이 지났어요. 얻은 게 뭘까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해서 30년 넘게 선수로 뛰었는데 그 선수생활보다 은퇴 후 4년 동안 배운 사회가 더 크게 와 닿아요. 전 가급적이면 야구와 관련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했어요. 사회를, 인생을 배우고 싶어서요. 야구인이란 이유로 야구만 파고 있으면 제 그릇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겠더라고요. 야구선수 때와는 또 다른 그릇에 새로운 인연들, 사연들, 경험들을 많이 담고 싶었어요. 그게 쌓이다 보니까 지식이 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립됐습니다. 요즘 강연을 다니고 있는데 운동선수는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냥 하는 얘긴데도 야구선수 출신이 아는 게 많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어요. 전 은퇴 후 책을 많이 읽었고, 강연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다른 강연자들이 하는 내용들을 공부하듯이 파고들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제게 기업에서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잃은 것보단 얻은 게 많았어요. 앞으로 더 채워가야 할 게 많겠지만요.”

2012년 4월1일 만우절에 은퇴 발표가 있었어요. 본인의 선택보단 구단의 선택이라고 보는 분위기가 더 많았는데요, 당시 상황이 아쉽진 않나요.

“딱 한 가지 후회되는 건 있어요. 만약 제가 지금까지 선수로 뛴다면 정후랑 KBO리그 최초로 부자가 리그에서 선수로 뛰는 기록을 세웠을 텐데. 그것을 제외하곤 아쉬운 건 없습니다. 선수들은 성적과 상대팀 선수들과 싸우는 게 직업인 사람인데 어느 순간 제 자신은 ‘은퇴’란 단어와 싸우고 있더라고요. 기자들도 지인들도 볼 때마다 언제 은퇴할 거냐고 인사처럼 물었으니까요. 전 아직 은퇴할 준비가 안 됐는데 저를 빼놓고 모두 준비가 된 듯했어요. 모두가 제 은퇴를 기다린다고 착각할 정도로요. 적당한 시기에 은퇴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아름다운 이별을 꿈꾸지만 그건 꿈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아요. 현실은 훨씬 더 냉정하고 냉혹하니까요.”

 

“이치로만큼 잘했을 거란 보장은…”

지금은 일본 프로야구보단 메이저리그를 보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대부분이에요. 현재 KBO리그는 물론 메이저리그 해설도 하는데 미국 무대를 경험하지 못한 회한이 남아 있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회한은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니요?

“당시 제가 살았던 광주는 AFKN이 안 나왔어요. NHK만 나왔죠.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어요. 대신 일본 야구를 보며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던 것이고요. 반면에 김선우(MBC스포츠 해설위원, 콜로라도 로키스 출신)는 서울에서 야구하며 AFKN에서 중계하는 메이저리그를 본 거예요. 그의 꿈은 메이저리그 진출이었고요. 결국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잖아요. 만약 광주에 AFKN이 나왔다면 제 꿈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야구하기에 체력적으로 좀 뒤떨어지긴 했지만요.”

재미있는 해석이네요. 광주에 AFKN이 나왔다면 이치로 버금가는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도 있었겠어요.

“그거야 ‘만약’이란 가정인 것이고, 제가 메이저리그에 가서 이치로만큼 잘했을 거란 보장도 없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때 상황이 그랬다고요. 전 다른 건 아쉬움이 없는데 한화 코치로 2년을 보낸 시간들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아요.”

어떤 아쉬움인가요.

“제가 있는 동안 꼴찌를 두 번 했습니다. 그런데 있는 동안 이 팀이 왜 꼴찌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중간에 다른 팀 출신이 들어가서 어찌해 볼 수 없는 그 팀만의 오랜 관습들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보니 하위권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제가 코치하면서 딱 두 번 큰소리를 친 적이 있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이종범’이란 이름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입 닫고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두 차례 정도 제 속마음을 꺼내 보였던 것 같아요. 그 경험도 제겐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선수를 지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됐었고요.”

코치로 선임됐을 때 이종범 정도라면 코치보다는 감독으로 직행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전 자신의 자리를 갖기 위해 기존에 있던 사람을 끌어내면서까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어요. 코치·감독 자리가 실력만이 아닌 인맥·학연이 작용하기도 하거든요. 자연스럽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돌아가자고 생각했고, 스승님이신 김응용 감독님이 계시니까 크게 고민하지 않고 코치 자리를 수락했던 거죠. 그 선택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넥센 히어로즈는 이종범 해설위원의 아들 이정후를 2017 신인 1차 지명 선수로 선택했다. © 연합뉴스

“치열함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속 노력해야”

언제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계획인가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방송 해설을 2년 했는데 현장으로 돌아가는 게 제 의지보다는 상대의 의지가 더 중요한 거잖아요. 정후가 만약 내년 시즌 1군에서 뛰게 된다면 정후의 경기를 중계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요. 언젠가는 정후를 상대팀 선수로 만날 기회가 있겠죠? 그런 상황이 펼쳐지면 꽤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뭐든지 서두르지 말자고 생각해요. 급할 게 없으니까요.”

야구를 하는 것과 해설하는 것의 차이는 꽤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연하죠. (더그아웃) 옆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의 시각차이라 클 수밖에요. 더그아웃에선 상대팀의 작전을 염두에 두기보단 내 것 하기에 바쁘잖아요. 중계석에서 야구를 볼 때는 양 팀의 작전과 움직임들이 모두 보이기 때문에 야구 공부를 제대로 하게 돼요. 해설 처음 시작할 때 사투리 때문에 애 좀 먹었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에요. 가끔 웃기려고 사투리 쓸 때가 있는데 지금은 표준어 사용하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가끔 ‘이종범’이란 이름의 무게가 버겁다고 생각하진 않나요.

“전 고용주가 아닌 노동자 신분이에요. 노동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야 합니다. 제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이종범이란 이름보다는 야구선수로서, 은퇴 이후 사회인으로서 매번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회에서도 경쟁이 치열하고, 그 치열함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전 계속 뭔가를 노력해야 하겠죠.” 

해설위원 이종범은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계획을 위해 해설도, 강연에도 최선을 다하며 자신만의 야구수첩에 모든 걸 기록해 둔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지도자는 선수들이, 팬들이 간지러움을 느낄 때 그걸 시원하게 긁어주는 역할이었다. 야구하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야구인,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야구인으로 살며 후배들에게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싶다는 ‘종범 신(神)’, 이종범은 여전히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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