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세월호' 유가족들 배상 소송에서 이겼다

2016. 10. 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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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카와 초등학교 유족들 26일 1심 손배소에서 승소
“가만히 있으라” 지시로 희생…세월호 사고와 판박이
법원 “학교의 과실이 인정된다”며 14억엔 배상 명령

지난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쓰나미 참사가 발생했던 오카와초등학교 운동장엔 천사상과 위령비가 서 있는 모습. 위령비는 참사 2주기를 맞은 2013년 3월11일 설치됐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좋은 판결입니다. 아이들이 하늘에서 듣고 있을 겁니다.”

26일 오후 3시5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자리한 센다이지방재판소 건물을 뛰쳐나온 변호단과 유족 대표가 기자들이 몰려 있는 정문을 향해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는 숨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이들이 펼쳐 든 두루마리 안엔 “승소! 아이들의 목소리가 닿았다!” “학교·교사를 단죄! 역사에 새겨질 미래를 여는 판결”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2년 반을 달려온 긴 투쟁의 승리였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일본에선 모두 1만58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서도 일본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남긴 참사는 미야기현 동북부에 자리한 이시노마키시 오카와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오카와 초교의 비극’이었다.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해안에서 4㎞ 정도 떨어진 학교에 쓰나미가 몰려든다는 게 예상됐는데도 교사들이 “운동장에 가만히 있으라”며 아이들을 잡아둬 학생 74명(교사 10명을 합쳐 전체 사망자는 84명)이 집단 사망했기 때문이다. 학교 뒤편에는 아이들이 언제라도 대피할 수 있었던 뒷산이 있었기에 교사들이 올바른 대응을 했다면 모두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었다. 2014년 6월 사고 현장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난 학부모 시토 다카히로(51)는 “아이들이 70여명이나 됐지만 서둘렀으면 10분이면 대피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 직후 학부모들은 시에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납득하지 못한 23명의 학부모들이 2014년 3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학교에 쓰나미가 몰려드는 게 예측 가능했는지, 다른 하나는 피난을 통해 아이들이 무사할 수 있었는지였다.

이날 재판부는 두 쟁점 모두에서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다카미야 겐지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이시노마키시의 차량이 학교 근처에서 (피난을 가라고) 호소한 3시 반 이후엔 쓰나미를 예측 가능했다는 게 인정된다. 가까운 뒷산으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강변의 교차로로 이동한 것은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이 지적한대로 사고 당일 교사들은 “뒷산으로 대피하자”는 고학년 아이들의 울먹임을 무시하고 아이들을 50분이나 운동장에 잡아뒀다가 쓰나미가 학교를 엄습하기 1~2분 전에 겨우 대피를 시작한다. 그것도 산이 아닌 쓰나미가 밀려오던 제방을 향해서였다. 오후 3시37분 쓰나미가 몰아쳤고, 결국 아이들이 희생됐다. 이 판결에 따라 미야기현과 이시노미키시는 유족들에게 모두 14억2600만엔(약 155억원)을 배상해야 한다.

이날 승소 판결을 받아든 한 유족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파란 하늘 아래 아이들이 (판결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 직후 가메야마 히로시 이시노마키시장은 “판결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판결문을 검토한 뒤 향후 대응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카와의 비극’은 2014년 4월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지시로 단원고 학생들이 숨진 ‘세월호의 비극’ 이후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사고로 6학년생 딸을 잃은 사토 도시로 ‘작은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는 2014년 5월 <한겨레> 지면을 통해 “여러분(세월호 유족)과는 어떤 형식으로라도 연대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후 세월호 유족들이 오카와 초등학교 추도식에 참여하는 등 양국 유족들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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