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낙태 처벌 강화? 낳으면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오락가락 미혼모 정책

정진용 입력 2016. 10.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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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어디 갔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회사 갔다고 해”

이유라(가명·29·여)씨는 여섯 살 난 딸을 가진 미혼모다. 그는 현재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취업을 준비 중이다. 이씨는 아이에게 아빠에 대한 ‘거짓말’을 알려줄 때는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그는 스스로 ‘남들보다 운이 좋다’고 얘기한다. 다른 미혼모들이 찜질방, 고시원을 전전하는 동안 그는 미혼모 시설에서 산후조리를 무사히 끝마쳤기 때문이다. 이씨는 “공동시설의 ‘텃세’는 있었지만, 임신 중인 예민한 시기에 ‘보호받는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로가 됐죠”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오갈 데 없는 임신한 미혼모가 머물 수 있는 미혼모자가족복지시설(미혼모 시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손을 놓고 있다.

급기야 정부는 저출산 문제 해결책으로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를 내놨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3일 인공임신중절 수술(불법 낙태 수술)을 근절하기 위해 의사 자격정지 기간을 기존 1개월에서 최고 1년까지 상향하려다 반대 여론에 부딪혀 백지화했다.

◇ 미혼모 여전한 생활고 “차라리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남을래요”

우리 사회에서 미혼모는 여전히 경제적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전국 한부모가족 255가구를 대상으로 파악한 ‘2015년 한부모 가족 실태조사’ 결과 전체 한부모 가족의 41.5%가 기초생활보장, 차상위 가구 등 저소득 한부모 가족이었다. 지난 2012년 첫 조사 때보다 1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정부 지원금(양육비)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는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라 기준 중위소득 52%인 143만원 (2인 가족 기준) 이하인 가정의 자녀가 12세 미만이면 월 10만원, 5세 이하면 15만원의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다. 지난해 2월 기준 만 0~3세 월평균 양육비는 41만2000원이다. 이마저도 기초생활보장 수급(기초수급)을 받는 자는 정부의 양육비와 중복해서 수급할 수 없다.

서울에 위치한 한 미혼모 시설 관계자는 “기초수급자가 의료보험 등 ‘한부모가족지원법’에서 지원하는 것보다 혜택이 더 많다"며 “때문에 미혼모들이 경제활동을 통해 수입원을 얻지 않고 차라리 기초수급자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경우가 있다. 의욕을 잃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설명했다.

◇ ‘마지막 피난처’ 미혼모 시설도 결혼 경력 있으면 거절

양육비 외에 주거 문제도 미혼모에게 큰 고민거리다. ‘2015년 한부모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한부모 가정은 생계비, 양육비 다음으로 주거를 도움이 필요한 분야로 꼽았다.

가족과 주위사람의 따가운 시선과 출산 관련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여성에게 미혼모 시설은 ‘최후의 피난처’와도 같다. 미혼모 시설은 일정 기간 동안 미혼모들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며 분만 지원과 자립을 위한 직업 교육을 해주는 복지시설이다.

그러나 이혼 경력이 있는 미혼모들이 정책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한부모가족지원법’ 19조에서 미혼모 시설 입소 대상자를 미혼 즉,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 한정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혼이나 사별을 한 뒤 아이를 가진 여성은 ‘미혼모’ 이지만, 미혼모 시설에 들어갈 수 없다.

한 미혼모 시설 관계자는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미혼모는 10대이지만 실상은 나이가 좀 더 있고 결혼 경력도 있는 여성들도 많다”며 “첫째가 있는데 이혼하고 둘째가 미혼모 자녀인 여성들이 미혼모 시설에 서류를 접수했지만 거절당했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상담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도 “미혼모 시설이 이혼 경험이 있는 대상자에 대한 지원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라며 “미혼모 지원 대상에서 ‘혼인 여부’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 지역별 편차도 심해…서울은 6곳인데 경북, 전북은 0곳

또 미혼모 시설은 숫자도 많지 않을뿐더러 지역간 편차가 심해 지방에 사는 미혼모들이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출산과 산후조리 도움이 필요한 임신 중인 미혼모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혼모 시설은 임산부를 위한 ‘기본생활지원형’(기본생활형)과 영아를 둔 미혼모가 입소할 수 있는 ‘공동생활지원형’(공동생활형) 2가지로 나뉜다. 기본생활형 개수는 20곳(입소 정원 520명)으로 공동생활형 38곳(입소정원 332세대)의 절반 수준이다. 또 지역별로 기본생활형은 서울 6곳, 경기 2곳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모두 1곳으로 서울에 집중돼 있다.

지난 2011년 말 33곳이던 기본생활형이 20곳으로 급감한 배경엔 여성가족부가 지난 2011년 개정한 ‘한부모가족지원법’이 있다. 정부는 미혼모 시설의 절반에 해당하는 입양기관이 운영하는 기본생활형 15곳을 2015년 6월 30일까지 폐쇄 하거나, 공동생활형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입양기관이 아이를 키우도록 돕기보다 입양을 권유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방자치단체와 여가부는 대체시설을 마련한다고 했으나, 2011년 말 2개소가 있던 전북과 1개소가 있던 경북은 아직 대체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채 0개소에 멈춰있다.

대구미혼모협회 김은희 대표는 “서울에만 여러 곳이 몰린 것은 분명히 문제”라며 “과거에는 출산일 당일에 입소하는 미혼모들도 많았지만 지방에 있던 시설이 많이 줄어든 이후 임신한 미혼모들이 아예 시설에 가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북 지역에서 지지난해부터 영아유기 사건 빈도수가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 기본생활형 문 닫게 해놓고 대체시설 깜깜무소식…지자체, 여가부 “아직 협의 중”

지자체와 여가부는 계속 협의 중이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입장이다.

전북도청 복지여성보건국 여성청소년과 관계자는 “시와 사회복지법인이 논의 중”이라며 “아무래도 시,군이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에 신중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국가보조금이 들어가는 사업인데 무조건 수만 늘릴 수는 없다”며 “지자체에 미혼모 시설을 운영할 만한 능력이 되는 운영법인을 계속 찾아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요건을 충족하는 법인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미혼모 시설을 가보면 빈자리가 많아 대한 수를 늘릴 계획은 없다”며 “서울에 유독 많은 이유는 미혼모들이 직장을 찾고자 몰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결혼 경력이 없는 여성도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지만 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말을 아꼈다.

◇ 전문가 “시설에 대한 수요 적다고? 수요 있어도 이용 못 하는 것”

전문가들은 여전히 시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혼모들이 많다고 강조했다.

박영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미혼모 시설은 한국 사회가 미혼모가 편견과 차별, 경제적 어려움 없이 스스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되기 전까지는 꼭 필요하다”며 “임신한 미혼모들의 이동 편의성을 위해 지역별로 적어도 인구비례별로는 미혼모 시설이 있어야 한다. 정부가 보호시설을 개선하고 숫자를 늘리는 등의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신옥주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장에서 의견을 들어보면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실명을 노출해야 한다는 점을 부담스러워 하는 미혼모들이 많다”며 “꼭 실명을 드러내지 않고도 익명으로 시설에 입소하고, 출산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독일의 경우 여성이 가명 하에 출산을 할 수 있는 등 제한적 익명출산제를 운영하고 있다.

신 교수는 이어 “정부는 미혼모 시설 수요가 적다고 선을 긋기 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왜 시설에 가지 못하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지적했다.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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