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잇는 문화계 성추행 폭로..피해자는 왜 이제야 입을 열었나

김나영 기자 2016. 10. 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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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가 부끄러운 성추행 논란으로 시끄럽다. 유명 소설가 박범신씨도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연합뉴스

부끄러운 성추행 논란이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밝힌 이들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 웹툰·문학·미술계 유명인사들의 만행을 폭로했다. 미성년자의 성폭행을 부추기고 이 내용을 만화로 그렸다는 주장부터 직접 성추행 당했다는 내용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충격적인 진술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화계는 충격에 휩싸였지만 한편으로는 터질 게 터지고야 말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소위 이름깨나 날리는 문화계 인사들의 갑질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이들의 만행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유독 문화예술계에서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반복되는 건 왜일까.

웹툰·문학·미술계 강타한 성추행 파문 문화계의 성추행 파문은 지난 18일 시작됐다. 본인을 피해자라고 밝힌 여성 A씨는 웹툰 ‘미지의 세계’의 이자혜(25·여) 작가가 미성년자였던 본인에게 남성 B씨를 소개해줬고, B씨가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의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 또 이 과정에서 이씨가 자신과 가해 남성의 성관계를 종용했으며 만화에 본인을 왜곡된 캐릭터로 등장시켰다고 주장했다. A씨의 폭로 직후 이씨는 해명글을 올렸으나 이내 삭제한 후 트위터를 통해 “과거의 성희롱 및 욕설에 대해 사과드린다. 타인에 의해 성폭력을 모의하도록 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며 모두 제 잘못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21일 돌연 이씨는 본인이 올렸던 해명글과 트위터에 남긴 글을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썼던 내용이라며 모두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확신하는데 저는 성폭력을 방조하거나 알선하지 않았다”며 “저의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기록과 자료들을 필요하다면 최대한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망한 마음에 미성년자 성폭행 방조·모의 혐의를 인정하는 듯한 글을 남겼으나 이는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뿐 사실과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이어 소설가 박범신(70)씨와 시인 박진성(38)씨는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자신을 전직 출판 편집자라고 밝힌 C씨는 트위터에 박범신 씨가 술자리에서 부적절한 신체접촉과 성적 농담을 해 불쾌감을 줬다고 주장했다. 영화 ‘은교’를 제작할 당시 주연배우인 김고은씨에게도 “남자 경험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고도 덧붙였다. 박진성 씨 역시 시인지망생 여성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거나 강제로 신체접촉을 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인 함영준(38)씨에 대한 폭로도 이어졌다. 함씨가 대학교 술자리에서 만취한 본인의 몸을 더듬었다는 내용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모두 SNS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사과했으나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지인에게 이같은 사실이 알려질까봐 가장 두렵다고 입을 모은다. 이 같은 상황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익명성이 보장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다. /출처=이미지투데이

SNS의 익명성 ‘숨고 싶은’ 피해자들의 연대의식 발동시켜 이번 문학계 성추행 논란의 피해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피해 사실을 스스로 밝혔다는 점과 사건이 발생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점이다. 물론 일련의 성추행 폭로가 사실로 판명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성추행은 꽤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제서야 폭로를 시작한 걸까. 전문가들은 성(性)이 여전히 은밀하고 부끄럽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피해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은 지인들이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로 낙인 찍힐 경우 동정이든 안타까움이든 떨치기 힘든 선입견이 생길 것이라 확신하는 탓이다. 자신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 남성에게 빌미를 제공했을 거라고 의심할 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누군가 용기를 내기 시작하면 반전된다.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숨어 있기를 결정했던 피해자들이 ‘나만 이런 고통을 당했던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일종의 연대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 이후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임 교수는 “여성이 취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늘면서 더 힘을 합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용되면 약자가 좀 더 쉽게 목소리를 내는 환경이 구축된다. 문학계 성추행 논란의 피해자들은 트위터 등 온라인 공간에서 폭로를 시작했다. 경찰서에 진술서나 증거를 제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신상정보가 노출될 가능성도 적을뿐더러 파급력이 커서 어렵게 낸 목소리가 묻히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덕분이다. 임 교수는 “약자가 부당한 사실을 폭로하는 데 SNS만한 게 없다”며 “익명성 보장·확장성 극대화라는 SNS의 특성이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계에서 갑질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은 도제식 교육방식과 폐쇄성 때문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출처=이미지투데이

스승·대가의 입에 명운 좌우되는 문화계, 제자·무명신인 절대 을(乙)일수밖에 없어 사실 문화계는 잊혀질 만하면 한번씩 성추행 파문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인권을 침해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갑질이 문화계에서 끊이지 않는 것은 도제식 교육방식과 폐쇄성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문화예술의 경우 객관적인 평가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리고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대가나 스승의 힘이 필요하다. ‘그들만의 리그(league)’에서 먼저 인정받을 수 있어야 전시·공연 등 대중에 스스로를 알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임명호 교수는 “문화계는 닫혀있는 사회다. 그들끼리의 세계가 공고하다”며 “외부와 의사소통이 활발하지 않다 보니 부당하다는 점을 입 밖으로 내는 교육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 편”이라고 설명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것도 ‘교육’ 없이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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