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고혈압, 그냥 혈압이 높다는 뜻으로 치부할텐가

송태호 송내과의원 원장·의학박사 입력 2016. 10.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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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호의 의사도 사람] 여러 합병증 일으키는 선행요인으로 밝혀져 집안 내력에 '풍' 없다고 방심말고 당장 치료를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는 1911년 생이다. 1987년에 돌아가셨으니 당시로선 비교적 장수하신 편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4~5년 전 뇌졸중에 걸렸다. 음주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대단한 애연가였다. 뇌졸중을 얻기 전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동네 병원에 가봤으나 별다른 치료 없이 수면제만 처방받아 드셨다. 의약분업 이전이어서 내가 할아버지 드실 수면제를 약국에서 사다 드린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히 고혈압이었을 텐데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만 잘 드셨어도, 아니 아스피린이라도 드셨다면 뇌졸중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혈압이란 병은 아주 희한한 병이다. 그냥 혈압이 높다는 뜻이다. 대개 병명은 그 이름만으로도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다. 폐렴이라 하면 폐에 염증이 생긴 병이고 위궤양은 위 점막에 궤양이 생긴 것이다.

혈압이 높은 게 어때서? 당뇨는 또 '단 오줌'이란 뜻이다. 고지혈증도 마찬가지다. 피에 기름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병이 될 만큼 중하단 말인가? 동의보감에는 당뇨는 '소갈증'이라고 언급돼 있지만 고혈압, 고지혈증은 그 합병증만 다룰 뿐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고혈압은 언제부터 병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인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1733년 한 수의사가 살아있는 말의 경동맥에 유리관을 넣어 말의 혈압을 잰 것이 최초의 혈압 측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세기 지나 러시아의 니콜라스 코로트코프가 위 팔뚝의 수축기/이완기 혈압을 측정하는 기구를 만들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쓰이는 혈압계가 되었다. 신경외과 분야에서 뇌압과 혈압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당시 의사들은 혈압이 올라간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압이 약하면 고지대에 물이 잘 안 나오므로 가압기를 설치하는 것처럼 혈압이 높아야 온 몸에 피가 원활하게 공급된다고 생각했다.

고혈압 상태가 인체에 해가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다. 1928년 미국 보험협회는 혈압이 높은 사람들이 사망률이 높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과학적인 이유를 댄 것은 아니고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업종의 특성상 통계를 내다 보니 그런 결과를 도출해 냈다. 당시 의사들은 이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1930년대에도 의사들은 고혈압이 생리적인 현상이며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1940년대 말 미국 매사추세츠주 프래밍햄시에서 대규모 역학실험이 실시되었다. 1948년 시작된 이 연구는 대를 이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비로소 고혈압이 여러 가지 합병증을 일으키는 선행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군병원에서 전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고혈압 치료를 받지 않은 70명 중 27명이 1년 내 뇌졸중에 걸렸고 치료를 받은 70명 중 단 한 명만이 1년 내에 뇌졸중에 걸렸다는 결과를 내놓으면서 고혈압이 과연 병인가 하는 기나긴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직도 고혈압이면서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대개 '나는 괜찮을 거야' 또는 '우리집에는 풍 앓은 사람이 없는데 뭘' 하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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