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 단속 회피하던 길, 유네스코회관 뒷골목

2016. 10. 20.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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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 중구 70년대 명동골목길 (중)

지난 2011년 10월28일 <한겨레>는 명동에 구한말 희귀한 배수로가 발견되었다고 단독보도했다. 땅속에 묻힌 배수로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단독보도까지 해가면서 특종을 냈을까? 신문은, 명동성당이 재개발 공사를 하면서 옛 주교관 앞쪽 주차장 터에서 땅속의 지하수를 모아 하수도로 보내는 배수구의 집수 부분이 발견됐는데, 이것은 한국 도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라고 보도했다. 더욱이 명동성당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었던 터라 그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무릇 모든 길은 물길과 함께 발전해왔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동네를 형성하며 길을 낼 때 대개 물길을 따라 냈던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길은 큰길이 되기도 하고 골목이 되기도 하였다. 명동성당 옛 주차장 터에서 발견된 배수로는 명동 골목길을 따라 남대문로의 대형 하수구에 연결되어 청계천으로 빠지는 첫 집수 부분이었다.

70년대 이름 있는 개봉관이었던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명동으로 들어갈 때, 극장을 휙 돌아들어가는 좁은 골목길이 그 주차장 건너편에 있었다. 그 골목길에는 아주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튀김집들도 있었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외국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 패널로 만들어 파는 골목 좌판이다. 거기에는 예수님 얼굴도 있었지만 서부영화에 나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망토 입은 모습, <초원의 빛>의 내털리(나탈리) 우드, <정무문>의 이소룡 사진 패널도 있었다.

그런데 그 골목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아무래도 남산 쪽에서 내려오는 작은 샛길이 아니었을까? 옛 지도를 찾아보니 틀린 추측은 아니다. 명동성당 쪽에서 내려온 샛길은 이 골목을 지나 삼일대로를 건너 저동(苧洞) 쪽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충무로 인쇄 골목으로 많이 알려진 골목을 따라 을지로로 이어진다. 태조가 한양을 조성하고 성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골목길이리라.

명동의 중심부 가로 방향은 지금은 명동길이라 하는데 동쪽 삼일대로부터 서쪽 남대문로로 향하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남북으로 뻗어간 세로 방향 골목 어귀들을 지나는데, 유네스코회관이란 비교적 높다란 건물을 왼쪽으로 보게 된다. 지금도 좀 높다랗게 보이지만 이 건물이 처음 세워질 때야 명동의 ‘마천루’였다. 이 높다란 건물은 1966년에 완공되었는데 배기형(1918~1979)이란 건축가가 1958년에 설계하여 1959년에 착공하였으니, 무려 7년 동안을 공사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추측을 깨고 11층의 통유리벽(커튼월) 공법 건물로 이루어냈다고 하니 명동길 지나갈 때 눈길이라도 한번쯤 줄 일이다. 당시 3층에서 5층까지는 영화관을 두었는데 70년대 사람들은 대개 ‘코리아극장’으로 이 건물을 기억한다. 어쩌면 곧 근대문화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70년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에 걸렸던 명동파출소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필자도 베토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긴 머리를 했다. 반곱슬머리에 장발을 하였으니 딱 봐도 부르기 좋은 별명이었다. 악명 높은 명동파출소 앞을 지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거나, 피해 가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은 맛집 거리가 된 뒷골목을 통해 지나가게 된다. 바로 유네스코회관 뒷길이다. 어쩌다 여성과 함께 걷게 되면 피차 피해 가야 한다. 그녀도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니 말이다. 멀쩡한 대낮에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검은색 제복 비슷한 것만 봐도 잽싸게 몸을 숨겨야 하고, 장발이 아닌 친구를 시켜 제복이 지나갔는지 염탐하게 했다.

그래도 잡히면 우선 파출소에 감금된다. 파출소 안 기다란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 더 큰 경찰서로 우송되기를 기다린다. 대개는 자정이 다 되어 닭장차를 타고 거주지 경찰서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쇠창살 안에 갇혀 같은 이유 등으로 끌려온 사람들과 아침까지 견뎌야 한다. 아침이 되면 이른바 보호자와 연락이 되는 자부터 석방되는데, 그때도 손기계로 덕지덕지 머리를 깎아 내보냈다. 우리는 그것을 ‘즉결심판’이라 했다. 그렇다고 그 이후 장발을 안 했을까? 미니스커트를 안 입었을까?

골목은 이래저래 역사다. 그 골목 속에 사람들이 살아오며 남긴 흔적들이 켜켜요 겹겹이다. 그 한 켜마다 생활의 지혜이고 그 한 겹마다 한 시대의 거울이다. (계속)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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