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죽음 앞에서도 인색한 '사과, 한 마디'

박수진 기자 입력 2016. 10. 20. 08:35 수정 2016. 10. 2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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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꿈나무' 숨지자…서로 "우리 선수 아냐" (10. 16.)

지난 7월 29일. 경찰청에서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를 만났습니다. 내정 소식이 알려진 후 약식으로 마련된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저에게도 질문을 할 기회가 주어졌고, 이 질문을 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위독하신데, 만날 생각이나 유감인사 전할 의향 있으십니까?”
이 청장의 답변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청문회 마치고 정식 임명되면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청문회를 거쳐 취임하기까지 이 청장 입에서 사과나 유감의 말은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사이 백남기 농민은 결국 사망(9월25일)했습니다. 국정감사 기간이던 지난 6일, 이 청장 입에서 처음으로 ‘애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유명을 달리한 백남기 농민에 애도를 표하며 유족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정작 고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지난 해 1차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청장을 맡고 있던 강신명 전 청장은 더 인색했습니다. 지난 9월12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그는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중태에 빠졌다면 사과하는 게 맞지 않느냐”며 야당 의원의 질의에도 “결과만 갖고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확고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다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남기 농민과 가족에겐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애도나 사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족들은 일단 거세게 반발하셨습니다.

● 안타깝게 숨진 고교 복서…책임 피하려 사과 안 하는 어른들

다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는 이유는, 최근 마주한 16살 고교생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입니다. 한 달 전 전국우승권대회에 출전했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고교생 복서 김정희 선수. 김 선수는 한 달 간 사투를 벌이다 결국 지난 9일 숨졌습니다.

김 선수의 부모님은 두 번 가슴을 쳤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큰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 또 하나는 아들의 사망 후 겪게 된 세상의 외면 때문입니다.

김 선수는 사고 당일 ‘화성시 체육회’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습니다. 경기를 주관한 대한복싱협회에는 ‘화성시 복싱협회’ 소속으로 선수 등록을 했습니다. 화성시 체육회는 화성시장이 회장으로 있는 화성시 산하 체육회고, 화성시 복싱협회는 체육회에 가맹된 단체 중 한 곳입니다. 소속 선수가 대회에 출전하면 예산을 지원하고, 선수를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곳들입니다.

김 선수는 화성시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해왔다고 합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지난 해에는 화성시 출신 경기도 대표로 소년체전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화성시 지역신문에는 당시 김 선수가 화성시 이름을 높였다는 취지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선수가 숨지고 나자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소속단체인 화성시 복싱협회는 "우리 소속 선수가 아니다’라고 외면했고, 상위 기관인 화성시 체육회는 ‘협회가 보고한 소속 선수 명단에 김 선수는 없다"며 책임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화성시 복싱협회장을 맡고 있는 모 건설사 회장과, 화성시 체육회장인 화성시장 등 두 기관을 대표하는 누구도 김 선수의 빈소를 찾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황망하고 서운했습니다. 대회에 나가 성과를 거둘 때는 너도 나도 찾아와 밥을 사고 사진을 찍더니,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자 "나 몰라라"하는 태도에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정희는 사고를 당한 거죠. 우리도 잘 알아요. 사고가 난 걸 협회나 체육회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는 그 책임을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단 한마디가 듣고 싶었어요. ‘정희는 자랑스러운 선수였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워줘서 감사합니다.’ 이 것 뿐이에요.”

● 뒤엉킨 거짓말들…“우리 잘못처럼 보일까 봐, 그게 진짜 민감하죠”

저 한마디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직접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화성시 복싱협회와 화성시 체육회, 그리고 화성시청의 여러 관계자와 전화를 하고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설명하면 ‘뒤엉킨 거짓말’들이 심심치 않았고, 그 거짓말의 배경은 ‘책임 피하기’였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면,

- 화성시 복싱협회 한 실무관계자는 “김정희라는 선수가 있는줄도, 그런 대회에 나가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지만, 이후 “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건 아니지만 실무를 총괄하는 B 전무가 출전을 허락한 것 맞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 화성시 복싱협회 B 전무는 “협회 선수는 아닌데 개인적으로 등록을 하고 나갔다”고 처음 말을 했다가, 대한복싱협회 선수등록확인서에 ‘화성시 복싱협회’로 소속팀이 명기된 것을 근거로 들자 “그럼 맞나보죠”라는 앞뒤가 안 맞는 발언을 했습니다.

- 화성시 체육회 실무 담당자는 “협회가 보고한 명단에 김 선수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 명단은 김 선수가 소속 등록(4월)을 하기 전인 3월 현황이었습니다. 그 이후 명단에 대해 묻자 “협회가 보고를 하지 않아 확인이 안 된다”며 협회로 책임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이유는 뭘까요. 사실 화성시 체육회나 복싱협회가 김 선수를 소속 선수로 인정을 해도 크게 달라질 상황은 없습니다. 소속 선수가 대회에 출전할 때도 보험은 개인이 가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상의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속 선수가 대회에 출전할 때 주어지는 지원비용이 김 선수에겐 지급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큰 돈도 아닌데다가, 협회에 따르면 올 해 받을 수 있는 지원 예산은 이미 다 받은 상황이라 더 지급이 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복싱협회와 체육회 관계자들은 취재 기간 내내 “우리는 그 아이에게 대회에 나가라고 강요한 적이 없어요”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김 선수 가족 중 누구도 이들에게 ‘왜 우리 아들을 대회에 나가게 했느냐’고 따진 적은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저희가 가장 민감한 게 뭔지 아세요? 자칫 잘못하면 진짜 우리가 잘못한 걸로 비춰질까봐 그래요. 이게 시 전체의 문제로 보여질까봐 민감하죠.” (화성시 체육회)

김정희 선수 관련 취재를 하면서 내내 백남기 농민이 떠올랐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과에 인색한 사회의 모습이 매우 닮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이 두려워 사과와 위로도 건네지 않는 사회, 우린 이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슬프지 않으십니까.      

박수진 기자star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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