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정권에 뒷돈 대지 말고 떳떳하게 세금 내라

안호기 논설위원 2016. 10. 1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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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기업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법인세율 인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단체이다. 법인세율을 올리면 수익이 감소해 기업활동이 위축돼 투자가 줄어들고, 고용도 악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경련은 최근 발표한 자료에서 “법인세를 올린다면 글로벌 경제전쟁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대표 기업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당면한 경제위기 극복 노력에도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법인세 인상은 기업을 옥죄는 일이라고도 했다.

전경련 회장을 3연임 중인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법인세율 인상 반대를 자신의 최고 책무로 여기는 듯하다. 그는 지난해 2월 취임하자마자 “법인세를 낮춰야지 올리면 되겠느냐. 세율을 올리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20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출범한 뒤 재벌개혁과 증세론이 불거졌던 지난 6월에도 “지금은 (법인세율을) 올릴 시기가 아니다”라고 재확인했다. 재벌개혁과 관련해서는 “(기업들이) 잘하고 있는데 무슨…”이라며 역시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랬던 전경련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모금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재단 설립을 추진했고, 자본금을 출연했다는 게 전경련 주장이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재단 설립과 이사장 인선 과정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 측근 최순실씨가 개입한 정황이 명확해 보인다. 청와대가 재단 설립을 주도했고, 안종범 청와대 수석이 모금에 개입했다는 기업 관계자의 증언도 있다.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 5단체’의 하나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박병원 회장조차 “(정부가) 미르라는 것을 만들고 전경련을 통해 대기업 팔목을 비틀어 450억~460억원을 내 굴러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모금 실무를 맡았던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어제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대부분 질문에 “수사 중인 사안이라 답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세금이라면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애쓰는 대기업도 정권의 요구는 거부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다. 출연금을 낸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에 약점이 잡혀 밉보였다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하거나, 대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미르·K스포츠 재단에만 10억원 이상 출연금을 낸 기업은 23개이다. 그룹별로는 삼성 계열사가 6개로 가장 많고, 현대차와 SK 각각 3개, LG·롯데·한화 각각 2개 등이다.

더민주 박영선 의원은 국감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회비를 낸 대기업을 보니 부패클럽”이라고 비판했다. 삼성과 현대차는 총수일가 3세인 이재용, 정의선의 승계, SK는 회장 특별사면, 롯데는 그룹 전반에 대한 수사 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박 의원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간 것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 돈을 조금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재계의 시각도 있다”고 전했다. 국감에서는 미르재단에 28억원을 낸 롯데에 대한 면세점 허가 특혜의혹도 제기됐다.

GS그룹은 10억원 이상 낸 계열사가 GS칼텍스 한 곳뿐이지만 거의 전 계열사가 모금에 참여했다. 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은 탓에 매출 규모가 작은 계열사까지 대거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그룹은 주력 계열사가 억원 단위로 출연한 것과 달리 GS는 1000만원 단위까지 세분해서 할당했다. GS글로벌과 GS이앤알은 지난해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음에도 출연금을 내놓는 안타까운 모습을 연출했다.

대기업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만 돈을 내는 건 아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기업들이 청년희망펀드 등 6개 민간 재단과 펀드·연구소에 내놓은 기부금만 2000억원을 웃돈다. 평창동계올림픽과 창조혁신센터 등에도 거액을 내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미소금융, 동반성장기금 등에 들어간 기업 돈이 수조원에 이른다. 법인세율을 인하한 뒤 기업에 떠맡기는 준조세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정부는 세금을 올리지 않는 대신 특정 목적에 사용할 돈을 기부하라고 기업을 겁박한다. 청와대와 여당은 기업 기부금을 자신의 밥그릇으로 여기는 듯하다. 법인세율을 올리면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기업은 어떤가. 치부를 덮어주고, 특혜 베풀기를 바라며 정권에 돈을 댄다. 기업과 정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비겁하고 추악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기업 기부금과 출연금은 정권 입맛에만 맞는 사실상 사적 분야에 쓰일 뿐이다. 준조세 성격의 기부금과 출연금을 없애고, 법인세율을 높여 기업이 보다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에게 고른 혜택을 줄 수 있다. 기업도 준조세보다 세금 내는 게 훨씬 더 떳떳하지 않은가.

<안호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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