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전경련 해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2016. 10. 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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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미르·K스포츠 기금 모금 논란 속 ‘정경유착 통로’ 차단 목소리 높아

“2015년은 우리 모두에게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메르스로 내수가 급속히 침체됐고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수출도 감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목표로 했던 3% 경제성장률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발간한 2015년 사업보고서는 한국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짙게 드리운 허창수 회장(GS 회장)의 인사말로 시작한다. 허 회장은 비관적 전망을 이어간다. “올해 우리 경제는 작년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중국의 성장둔화, 저유가, 미국의 금리인상 등이 세계 경제에 불안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국내 상황도 녹록지만은 않습니다. 지속되는 저성장 기조로 가계 빚이 늘고 소비여력도 줄어 내수경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주력산업은 경쟁력을 강화하는 중국과 가격으로 위협하는 일본 사이에서 매우 힘든, 이른바 신(新)넛크래커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복지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국가예산의 운용도 차질이 예상됩니다.” 국제 경제, 국내 산업경쟁력, 국내 소비시장, 국가재정 등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가 나쁜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의미다. 전경련은 어려웠던 한 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국책사업 정부 파트너로 기업 관리·조정

500여 회원사를 대상으로 하는 보고서는 2015년 첫 번째 주요사업으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진전을 소개했다. 보고서는 12월 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1층에서 열린 이 사진전을 “산업입국의 기틀을 마련한 경제국부의 기업가 정신을 재조명하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4월 13일 파독·중동 근로자, 월남전 참전자 등을 초청한 전경련회관 정원음악회가 뒤따라 나온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우리의 평범한 영웅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광복절 연휴 기간 전국 5대 도시에서 열린 콘서트와 불꽃 축제가 다음으로 소개됐다. “청년실업, 메르스 등으로 위축된 사회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저성장 시대에 대한 공감대 형성, 법질서 강화, 산업경쟁력 제고 등 경제정책과 연관된 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구체적 내용은 없다. 전경련과 정부·여당 인사가 참여한 각종 행사 사진이 나열돼 있다. 서문에 언급한 위기의식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전국경제인엽합회 건물/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전국경제인엽합회 건물 / 이상훈 선임기자

전경련은 정경유착 논란에도 휘말렸다. 지난해 설립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은 전경련이 주도적으로 800억원 가까이 모금해 3일 만에 설립 허가가 나는 등 졸속으로 설립됐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정부 사업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씨(60·최서원으로 개명), CF감독 차은택씨(47) 등의 전횡 의혹을 받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전경련 해체론’이 나오는 이유다.

전경련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경제인들이 부정축재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발족한 ‘경제재건 촉진회’를 전신으로 한다. 전경련은 재벌 위주 경제개발 단계에서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대표적 경제인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외국자본 유치와 수출자유지역 조성을 건의했으며, 대규모 국책사업 때 정부의 파트너로 참여 기업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1대 회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와 함께 경제5단체를 이룬다. 다른 단체 4곳과 달리 법적 근거에 의해 설립되지 않은 민간단체로,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된다. 전경련의 연간 예산은 약 500억원으로, 삼성 110억원, 현대차와 SK가 각 60억원, LG가 50억원가량을 부담한다. 500여개 회원사가 가입돼 있지만 실질적으로 재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도록 돼 있는 구조다. 기업 총수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회장보다 상근부회장 등이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경련 사무국은 회원사로부터 받는 500억원가량의 예산을 집행하지만, 이사회와 총회 등 형식적 절차만 거치면 외부 감사 없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매 사업연도가 끝난 후 2개월 이내에 사업계획서와 함께 수입·지출 예산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을 뿐이다. 민간 비영리단체로 분류돼 회계보고에 대한 상세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홍종학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에 따르면 전경련은 2012~2015년 산자부에 제출한 수입·지출 예산서 중 사회협력회계 부분은 영수증과 증빙서류 없이 지출총액만 보고했다. ‘2012년 209억5371만원, 2013년 185억627만원, 2014년 257억4316만원, 2015년은 170억원’이 보고된 게 전부다.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에 지원한 자금은 사회협력회계에서 지출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사업내용 큰 변화

전경련의 사업 내용은 박근혜 정부 들어 큰 변화를 보였다. 회장이 공석이던 2010~2011년 동안 사업 내용은 부실해졌다. 전경련은 참여정부 시절 수도권 과밀화 억제방안 및 대기업 계열사의 출자총액 및 순환출자 제한을 핵심으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두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년 사업보고서마다 투자 확충 및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며 규제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의 정책제언을 보고서의 핵심사업 중 우선순위로 올렸다. 이명박 정부 때에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통해 토지이용 규제완화, 금산분리 개정, 공정거래법 개정은 물론 법질서 확립과 노동자 임금인상 자제 및 대졸 초임 동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녹색성장은 5순위로 제시됐다. 반면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창조경제는 2013년 사업보고서의 1순위 과제로 올라갔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 없이 박 대통령과 전경련 임원단이 참여한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후에도 박 대통령의 발언을 전하는 데 그쳤다. 2013년부터 상근부회장을 맡은 이승철 부회장의 ‘스타일’이 반영됐다는 것이 재계 안팎의 중론이다. 이 부회장은 고려대 경제학과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경제조사본부 본부장, 국제경영원 원장 등을 거쳤다. 대부분의 경력을 전경련 내 관료조직에서 보냈다. 2014년부터는 창조경제민관추진합동단장을 맡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이념과 통치스타일도 전경련의 행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제학자·시민운동가 출신인 홍종학 전 의원은 “2006년 대선후보 경선 시절부터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을 내세워 친기업 정책을 추진한 반면, 박 대통령은 ‘줄푸세’ 정책으로 규제완화와 관련해서는 이념적으로 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2012년에는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지만 취임 후 경제정책 행보는 2006년 당시와 매우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전경련의 2012년 사업보고서에 나타난 제일 중요한 과제는 경제민주화 대응이다. 전경련은 대선을 보름 앞두고 ‘경제민주화, 아는 것만큼 보입니다-이슈별 오해와 진실’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해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지주회사 규제 강화,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도입, 대형마트 규제 등 16개 핵심 이슈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 정책을 둘러싼 대응도 2012년 이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홍 전 의원은 “박근혜 정부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친재벌적 정책을 펼친 것이 전경련에 안도감과 자신감을 준 것이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규제완화 등을 단행했음에도 일자리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재벌들이 사내유보금만 쌓아놓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2010년 “전경련이 대기업의 이익만 대변한다”며 비판하고, 이듬해 동반성장위원회를 설립했다.

전경련은 더 이상 재벌의 이익조차도 제대로 대변하지 않는 조직이 됐다는 목소리가 재계 안팎에서 나온다.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교수)은 “전경련은 재벌, 그 중에서도 삼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던 기구인데, 점점 회원사들로부터도 멀어진 인사이더(insider) 조직이 됐다”고 말했다. 회원사의 뜻과 관련 없이 내부 상근자들의 입김이 커지려면 회원사의 외면이 전제조건으로 필요하다. 재벌 대기업을 포함해서다.

재벌의 이익조차 제대로 대변하지 못해

김 소장은 “전경련이 참여정부 시절 정부와 충돌했던 이슈 대부분은 삼성의 이익에 복무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정표 건국대 교수는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재벌이 지목됐고, 1990년대 말 재벌개혁의 목소리가 높았다. 한국 경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기회였다”며 “김대중 정부는 1년 6개월 만에 IMF 위기극복을 선언했고 재벌개혁의 동력도 상당 부분 상실했다. 그 결과 30대 그룹의 절반 이상이 교체된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재벌집단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됐다. 삼성이 단적이었고 이후의 재벌개혁은 사실상 삼성개혁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삼성의 이해관계가 전경련을 매개로 ‘재벌의 이해’ 또는 ‘기업의 이해’ 관계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다른 기업들의 내부적 불만도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전경련은 2009년 산업활동에 대한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종합편성채널 승인 및 신문사의 방송사 겸영을 허가하는 미디어법 개정안을 지지했다. 국내 20대 그룹 안에 포함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재벌 대기업 대부분은 미디어법 개정을 원하지 않았다. 광고 지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라며 “미디어법 개정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재벌은 딱 하나”라고 말했다.

전경련의 무능화와 정권 예속은 일종의 ‘자충수’인 셈이다. 하지만 “전경련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능하다고 남겨두기에 전경련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정경유착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8·15 특사로 4대강 입찰담합에 참여한 건설회사들이 모두 사면됐다. 홍 전 의원은 “입찰담합에 가담하면 다시는 국책사업에 참여할 수 없도록 법이 개정됐으나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해당 기업들에 대한 법적용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대법원이 2015년 유죄를 확정짓자 그해 8월 바로 사면을 집행했다”며 “재벌 총수 사면보다 더 중요한 이슈였다. 법을 어긴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겼다”고 말했다. 홍 전 의원은 “재벌 인사와 관료 혹은 정치인이 직접적으로 만나면 정경유착의 의심을 받지만 전경련으로서 만나면 실질적인 ‘로비’나 다름없는 일을 하면서도 의심은 피해간다”며 “일반 국민들은 법적으로 로비가 금지되는데, 재벌들에는 예외가 되는 특혜”라고 말했다.

전경련 정관 제1조는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경제정책 구현과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하기 위함”이라고 단체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2015년 사업보고서는 “경쟁국에 비해 과도한 글로벌 스탠더드 적용은 우리 경제의 도약을 어렵게 한다”며 노동개혁을 주문한다. 전경련이 지속적으로 주장한 것은 기업의 환경부담 경감이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계획에서 “배출총량 대비 감축이 아닌 배출전망치 대비 감축(BAU) 방식으로 정책을 유도해 기업의 부담이 되는 것을 막았다”며 2009년 사업보고서에서 자평한다.

김상조 소장은 “시장경제는 특정 기업이 아니라 모든 기업이 동의할 수 있는 규칙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며 “특정 기업만 이득을 보는 구조라면 오히려 시장경제에 가장 반하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전경련 대신 법정 단체이자 중소상공인을 포함한 가장 많은 경제단체가 가입한 대한상의가 기업집단의 대표로 나서야 하고, 정부나 언론에서도 대한상의를 기업의 대표로 호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원치 않는 회원사는 전경련을 탈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최정표 교수는 “전경련은 재벌의 이득을 대변하는 곳이고, 근본적으로는 다시 재벌개혁을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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