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타락, 책임 없는 사회

박송이 기자 2016. 10. 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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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문가들이 학문적 양심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좇는 것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오래된 문제다. 그리고 이해관계로 결합한 ‘관피아’와 ‘학피아’의 유착은 흔한 일이 됐다.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선하 교수가 쓴 사망진단서에 대한 ‘사회적 판단’은 사실상 이미 내려진 것 아닌가.”

김덕진 백남기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은 말했다. ‘사회적 판단’에 따르면, 백선하 교수의 사망진단서는 틀렸다. 백남기대책위가 ‘병사’로 기재된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문제를 제기하자, 여기에 동의하는 목소리들이 뒤따랐다. 서울대 의대생들이 가장 먼저 응답했고, 서울대 의대 동문도 성명을 발표했다. ‘병사’가 아닌 ‘외인사’가 맞다는 내용이었다.

‘전문가의 판단’은 ‘사회적 판단’에 밀렸다. 그것도 과학적 근거에서 밀렸다. ‘전문가의 판단’ 배후에는 정치권력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뒤따랐다. 유족 및 백남기대책위 등의 시민사회는 백 교수와 서울대병원이 정치권력과 긴밀한 연락망으로 연결돼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의 말이다. “서울대병원이 고 백남기 농민을 진료했던 기록을 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진료차트에는 담당의가 아닌 서울대병원 경영진이 진료에 직접 관여한 부분이 나온다. 신찬수 서울대병원 부원장이 승압제를 투여하라고 직접 지시한 내용이 차트에 나온다. 내분비내과 의사가 다른 과 중환자실 환자에 대한 오더를 내린다? 매우 이례적이다. 3년차 레지던트가 신 부원장과 백 교수와 상의해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는 메모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레지던트가 부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는데, 병원의 위계질서상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대병원 운영진이 사망진단서 작성에 개입했다고 보는 이유다.”

점점 커지는 의혹과 시민사회의 거센 반박을 예상치 못했을까. 서울대병원은 재빨리 특별위원회를 꾸렸다. 그리고 입장을 발표했다. 서울대병원은 외인사가 맞다고 판단하지만, 주치의인 백 교수는 병사라고 생각하는 만큼 이를 강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서울대병원의 발표로 백 교수는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김덕진 위원장은 “서울대병원이 수습을 하려 한 것인지 교묘한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윤성 특별위 위원장과 백 교수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이 교수가 백 교수를 비난한 셈인데, 백 교수는 이제 서울대병원 안에서도 수세에 몰렸다. 백 교수가 다른 유형의 외압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판단’에 밀린 ‘전문가의 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교수가 버티는 이유가 무엇일까. 백 교수를 안다는 사람들은 ‘개인의 기질’이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지금 상황으로는 백 교수가 이 일로 이득을 보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황승식 인하대 의대 교수의 말이다. “사망진단서는 오랫동안 환자를 보았던 담당의사의 전적인 권한이자 책임인 건 맞다. 이윤성 위원장이 백 교수를 비판하는 이유는 내부에서 함께 회의를 하고 조사를 했는데, 조사위원회의 결정을 끝까지 안 받아들이고 버티기 때문이라고 본다. 백 교수가 권력지향적이라 권력의 입맛에 맞춘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사실 이렇게 끝까지 버티면서 결국 백 교수는 자신의 수장인 서창석 서울대병원장까지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려나가게 만들지 않았나. 백 교수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치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울대병원의 입장 선회로 백선하 교수 홀로 ‘사회적 판단’과 대치하는 모양새가 됐다. 그렇다면 이번 사망진단서 논란은 백선하 교수라는 전문가 개인의 일탈로 봐야 할까. 그러나 개인의 자질 문제를 넘어 서울대병원 전문가 집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태웅 고려대 교수는 “모든 걸 구조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되지만,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해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지금 구조적으로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권력의 나쁜 의지가 전문가의 영역에 언제든 개입할 여지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백 교수 본인과 함께 서울대병원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봐야 한다는 목소리다. 김덕진 위원장은 “서울대병원장이 특위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치적 판단을 하든, 이대로 밀고 나가든, 잘못을 인정하든 지금 상황에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서창석 원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은 “전문가 집단의 윤리에서 볼 때 제일 비겁한 것은 서울대병원이다. 전문가 개인에게 맡겨놓고 서울대병원은 ‘면피’로 가고 있지 않나. 병원에서 책임있게 해결해야 하는데, ‘나 같으면 그렇게 안 썼다’는 말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게 말이 되나. 그럴 거면 사망진단서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왜 있으며, 해마다 의사고시에서 이와 관련한 문제를 왜 내느냐”고 말했다.

백 교수 개인이 아닌, 서울대병원이라는 전문가 집단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전문가 거버넌스의 붕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의 말이다. “한국 사회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이익을 좇아 각자도생하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낸 사건이다. 지금은 과거 독재정권 때처럼 전문가들이 권력에 매수된다거나 위에서 강압적인 명령이 내려와 이를 수행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압에 의한 것이라면 양심선언이라도 하겠지만, 이 사안에 관여된 전문가들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양심선언을 할 사안도 아니라고 볼 것이다. 오늘날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자본 삼아 알아서 권력에 충성하고 각자도생하고 있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겠지만, 백 교수가 사망진단서를 병사로 쓴 이유는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사회적 공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치를 지향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이 유리한 대로 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특별위원회에서 이윤성 교수가 백 교수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전문가들이 사회적 공익에 대해 합의된 룰 없이 각자 의견을 내놓고 충돌하는 붕괴된 전문가 거버넌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양대 의과대학생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에 전국 의과대학 809명의 연명이 담긴 성명서를 부착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전문가 거버넌스’ 붕괴된 서울대병원 우석균 공동대표는 전문가 거버넌스가 붕괴된 서울대병원의 사례는 한국의료계의 생태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인리히의 법칙이 있다.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법칙이다. 백 교수 건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전문가의 자율성 존중은 과학적 근거를 전제로 한다. 그게 없다면 근거 없는 고집이다. 백 교수가 사망진단서를 그렇게 써도 용인이 됐고, 신경외과의 과장까지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게 가능한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백 교수의 사망진단서에 대해 서울대병원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한 게 있나. 급조한 특위는 면피용에 불과했다. 문제를 제기했던 건 서울대병원이 아니라 서울대 후배들이었고 동문들이었다. 자정작용은 병원 내부가 아닌 시스템 밖에서 작동했다. 의사협회도 마찬가지다. 뒤늦게 성명을 냈지만 국회의 물음에 답해야 했기 때문에 성명을 낸 것이지 의료계 시스템 내부의 자정작용이라고 볼 수 없다. 한국 사회 의료시스템의 가장 정점에 있는 서울대병원에서 학문적 양심이 작동하지 않고 거꾸로 전문가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비학문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 거버넌스가 붕괴되고, 전문가들이 학문적 양심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좇는 것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오래된 문제다. 이러한 구조에서 정치권력이 전문가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활용하는 일은 어려운 일도, 드문 일도 아니다. 이택광 교수는 “전문가들이 권력이나 이익을 좇는 게 곧 ‘자기계발’이 되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의 윤리란 새삼 허망한 이야기이다. 권력관계 속에서 전문가의 윤리가 균열되는 일은 계속 있어 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전문가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력과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의 합을 맞추는 주요 계기는 ‘정부 용역’이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건강형평성센터장은 정부 용역에서 관료들의 입맛에 따라 연구 결과가 뒤바뀌거나 은폐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때 공공연구 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한 과제는 중간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던 학회 당일 주무부처의 권고에 의해 발표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의뢰를 받은 연구과제도 그랬었다. 공개적인 중간 결과 보고회 전날, 분석 결과가 ‘갑’인 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인쇄물을 배포하지 말고 또 민감한 사안들은 발표 내용에서 제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는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선진국에서는 기업과 학계의 유착은 문제가 되어도 정부의 연구비 지원, 즉 공공 재원에 의해 수행한 연구 결과를 두고 이해 갈등이나 유착이라고 표현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연구 결과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나 은폐를 경계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관료 입맛 따라 결과 바뀌는 정부용역 그러나 전문가 거버넌스가 붕괴된 한국 사회에서 이해관계로 결합한 ‘관피아’와 ‘학피아’의 유착은 흔한 일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전마피아’라고 불리는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다. 얼마 전 잇따른 지진으로 원전 안전문제는 시민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러나 원전 관련 전문가 대부분이 한국수력원자력의 용역 수주와 연관돼 있는 상황에서 이들 전문가 집단이 안전문제를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까.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의 말이다. “경주 지진 이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객관성에 대한 문제점들이 쏟아져나왔다.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의 발표에 따르면 원자력안전위원회 전문위원들의 3분의 2가 평균 28억원의 정부 수주 과제를 했다. 정부가 전문가들을 돈으로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재임기간만이라도 이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에 한수원의 정책과제가 발표됐는데, 서울대 원자력공학과에 수십억원 과제를, 경희대 원자력공학과에 수십억원에 달하는 과제를 줬다. 나눠먹기 식이다. 이런 식으로 돈으로 입을 막아놓으면 누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발주자가 다르면 같은 연구라도 다른 결과가 나온다”며 현재 한국의 원전 안전분야는 전문가들의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지진 이후 소방방재청 보고서가 은폐됐다고 논란이 있었다. 동일한 지역에서 최대지진 평가를 했는데, 한수원에서 발주한 것과 소방방재청에서 발주한 것과 결과가 크게 다르게 나왔다. 한수원의 최대지진 평가가 훨씬 낮게 나왔다. 두 보고서에서 사용한 식도 크게 다르지 않고 참여한 전문가도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동일했는데 왜 다르게 나왔을까. 결정적으로 데이터에 사용한 단층들이 달랐다. 지진에 대해서 평가하면 가능성이 있는 모든 단층들을 고려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 결과적으로 한수원이 발주한 보고서는 한수원의 입맛에 맞게 결과가 나온 셈이다.”

월성1호기 계속운전 허가안을 논의 중인 원자력안전위원회 회의. / 강윤중 기자

문제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는 전문가 전문가 거버넌스가 실종됐고, 과학적인 근거보다 이해관계에 따른 연구 결과가 아무런 제재 없이 유통되지만,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해도 전문가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 양이원영 처장은 경주방폐장 부지 선정 당시 문제가 발생해도 관료와 전문가들이 어떻게 책임을 회피해 나갔는지를 설명했다. “관료들이 전문가를 동원해 부지선정위원회를 만든다. 소위 명문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부지평가보고서를 만들게 한다.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은 채 평가 결과만 우수한 것으로 발표된다. 그렇게 결정한 부지를 선정하고 부지선정위원회는 해체한다. 그런데 막상 공사를 들어가 보니 엉망이다. 그러나 관료들은 전문가들이 그렇게 평가를 했다고 하고 전문가위원회는 이미 해체되고 없어진 상황에서 누구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택광 교수는 “전문가들에게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선진국에서는 동료 평가가 냉정하게 이루어지는 편인데, 한국에서는 이것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타락해버리면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말했다. 수질악화, 녹조 등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4대강이 대표적인 사례다. 박재광 위스콘신대 교수는 학계의 4대강 전도사를 자처하며 <나의 조국이여 대운하를 왜 버리려 합니까>라는 책을 썼다. 박석순 전 이화여대 교수는 배가 다니면 수질이 좋아진다는 논리로 4대강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조원철 연세대 교수는 보를 세운다고 수질이 나빠지지 않는다며 4대강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들 전문가는 수질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4대강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윤태웅 교수는 “한국의 전문가들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 얼마나 예민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전문가들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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