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직설]아빠의 모성, 엄마의 부성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 2016. 10. 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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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육아서는 대개 어린 자녀를 둔 엄마를 대상으로 한다. 부모가 같이 읽는 경우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육아서는 대체로 엄마의 마음을 겨냥한다. 책 제목에도 ‘엄마’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엄마의 말 공부>, <엄마와 아이 사이 아들러식 대화법>, 심지어는 <무심한 엄마가 왕따 아이를 만든다>는 제목의 책까지 있다. 아이는 부모가 같이 키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흔히 아이와 엄마 사이의 애착이 불안정해서 그렇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여전히 아이에게 세심하게 공감하며 정서를 보듬는 일은 주로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바, 여자가 남자보다 생물학적으로 공감 능력이 우수하다는 증거는 없다. 공감 정확도에 관한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면, 공감을 평가하고 있다는 상황적 단서를 줬을 경우에만 여자가 남자보다 공감을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 않은 경우 남녀의 공감 능력의 차이는 없었다. 자신이 공감과 관련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여자들은 더 잘해야 한다는 일종의 성 역할 기대를 갖는다. 이에 따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열심히 평가에 임하게 되고 그 결과 더 나은 공감도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외적 보상이 주어지거나 공감을 잘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남자도 여자와 같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보인다.

남자들도 회사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그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발휘한다. 공감 능력은 권력과도 연관이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한 명은 상사 역할을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부하 역할을 줘서 ‘상사-부하 역할놀이’를 하고 나면, 부하 역할을 한 사람이 상사 역할을 한 사람보다 공감 능력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권력감의 차등이 공감력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권력은 상대적이다. 가부장제 아래서 남성이 권력의 우위를 점하는 것과 공감을 여성의 역할로 치부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공감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 애써 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안 하다 보면 잘 못하게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아빠는 육아 휴직 중>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다. 아빠가 1년간 육아 휴직을 받아 육아를 전담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엮어낸 책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아빠가 주 양육자로 아이들을 돌보는 상황이 되고 보니 퇴근해서 돌아온 엄마를 향해 아빠가 먼저 말을 건다. 엄마는 피곤해하며 대화를 피한다. 아빠는 공감을 바라지만 엄마는 대화에 응해주지 않는다. 역할만 바뀌었지 익숙한 장면이다. 자신은 전업주부로 지내고 아내가 직장 일을 하는 구조가 되자 남편은 깨닫게 된다. 전업주부가 수다쟁이가 되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가 어떤 일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날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할 때 상대가 거기에 맞장구치고 공감해주지 않으면 서운해진다. 역할을 바꿔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다.

모성, 부성은 수시로 전도될 수 있다. 아빠가 주로 아이를 돌보고 엄마가 경제력을 담당하면 아빠는 모성애를 계발하고 엄마는 부성애를 발휘하게 된다. 한부모 가정에서 아빠와 딸이 같이 지내는 상황에서라면 아빠는 대개 엄마 역할을 하고 모성을 발휘하게 된다. 오랫동안 한부모 가정으로 지낸 경험이 있는 일본의 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집에서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재우는 것은 엄마가 하는 일이라서 아빠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가 되면 발성법에서 몸짓까지 다 바뀝니다. 그러면 ‘역시, 젠더 롤(gender role)이란 성 역할 연기구나, 이것은 연기하는 거야’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모성애라는 것은 내재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역할 연기입니다.” 그의 말처럼 모성은 환상이며 부모는 역할이다. 모성이 역할 연기라면, 이 역할은 남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상대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의 느낌을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자동적이기보다 의식적인 작업이다. 여기에는 남녀가 따로 없고 부모가 따로 없다. 공감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 남녀 임금 격차가 줄어들고, 부모 모두의 육아 휴직 사용이 활발해지며, 우리 각자가 자신을 둘러싼 이분법적 성 역할 기대에서 벗어날 때 부모도 행복하고 아이들도 더 유연하게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나은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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