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하면 왜 복면 쓰냐고?.. '식별'을 위한 위험한 욕망

김현호 입력 2016. 10. 2. 13:17 수정 2016. 10. 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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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읽어드립니다<15> 얼굴 공개 강요하는 권력
지난달 25일 백남기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운구차 옆에 늘어선 시위대. 권력은 이들을 향해 당당하다면 얼굴을 드러내라고 한다. 오마이뉴스 제공

이것은 2016년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싣고 빈소를 향하는 운구차를 찍은 사진이다. 예순아홉 살의 그는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쓰러졌다. 시민들은 피를 흘리는 백남기 농민에게 쏟아지는 강렬한 물줄기를 등으로 감싸며 버텼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 사진은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서 317일을 버틴 그가 끝내 자신의 고단한 몸을 떠나는 날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진 속의 시민들은 운구차를 몸으로 둘러싸고 어깨걸이를 하며 버틴다. 시신을 빼앗겨 강제로 부검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대열의 맨 앞줄에 선 여성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아마 카메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집회 시위 현장은 사진과 동영상의 전쟁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은 불법 폭력시위를 막겠다며 집회 참가자를 채증하고, 집회 참가자들 역시 경찰의 과잉 진압을 막겠다며 촬영한다. 경찰이 복면을 벗으라고 하면 참가자들은 제복에 이름표나 달고 나오라며 맞선다.

당연히 이 싸움은 공정하지 않다. 경찰의 채증 활동은 “불법행위 또는 이와 밀접한 행위”에만 제한된다. 그럼에도 지난해 경찰이 집회 시위에서 벌인 채증은 1만 건을 넘어섰는데, 이는 재작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작년 불법시위 건수가 30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채증이 과도했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숫자다.

운구차 앞에 선 여성들이 마스크를 쓴 것은 경찰의 채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진은 유독 여성들에게 더 잔혹하고 위험하다. 집회 장소에 우글우글한 카메라 중 하나에 찍힌 사진은 언제든 조각조각 잘려 디지털 네트워크를 타고 마구 퍼져나갈 수 있다. ‘시위녀’라는 이름이 붙은 그녀들에게 쏟아지는 조롱과 품평, 성적 폭언, 희롱은 차마 옮겨 적기 어렵다. 수많은 눈들이 사진을 샅샅이 훑어보고 신상을 털어 돌려보며 희희낙락한다. 사진을 이용한 성적 조리돌림이라 할 만하다.

2015년 11월 19일, 당시 새누리당 대표였던 김무성 의원은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복면금지법’ 도입을 주장했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맨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이 글에서 굳이 그에게 “(집회) 참가자는 참가의 형태와 정도, 복장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는 2003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지닌 의미를 설명할 생각은 없다. 복면을 착용하면 곧 불법 폭력 집회를 할 것이라고 하는 전제가 잘못되었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상기시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김무성의 주장은 사진에 대한 전형적인 권력의 욕망을 잘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권력은 언제나 시민을 구분하고 식별할 수 있는 통제력을 원했으며, 사진은 그 욕망에 충실히 복무해왔다. 사진은 그림과 함께 미술관에 전시되는 예술 작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범죄자를 식별하고 인구를 관리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예를 들어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우리는 사진 발명 이전의 범죄 수사 모습을 볼 수 있다. 범죄자인 장발장은 심지어 다른 시에 가서 시장이 된다. 샹 마티외라는 남자가 장발장으로 오인받아 경찰에 붙잡히기도 한다. 이는 장발장을 식별할 수 있는 이가 자베르 경감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붙잡은 용의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를 빈민가나 감옥에 끌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질문해야 했다. 범죄를 저지른 이가 철도와 같은 새로운 교통 수단을 통해 다른 도시로 도망가서 이름을 바꾸어 사는 경우는 흔했다. 심지어는 중범죄자가 다른 곳에서 빵을 훔친다든가 하는 작은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숨어 사는’ 일도 있었다. 개인을 식별하지 못하는 권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권력이 시민을 식별하기 위한 정보를 지나치게 탐욕스럽게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많은 정보를 국가에게 내주었다. 한국의 주민등록제는 모든 개인에게 식별 번호를 부여하고 얼굴과 지문이라는 생체 정보를 담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다. 또한 국가는 영장을 통해 메신저, 통화내역, 신용카드와 계좌정보, 이동기록까지도 확보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김무성 역시 마찬가지로 ‘국가의 안전’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과연 ‘안전’이란 무엇인가? 집회에 참석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사진이 찍히고 개인이 식별될 수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안전한가? 참가자는 자신의 얼굴 사진이 경찰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사용되는지 알 수 없고, 집회 현장에 있는 수많은 카메라중 하나에 찍힌 자신의 모습이 유통되는 일을 막지 못한다. 익명성과 식별되지 않을 권리는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개인을 지키는 작은 안전장치다. 그렇다면 복면을 금하는 사회가 허락하는 사회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 아닌가. 집회에 나가는 이에게도, 그렇지 않은 이에게도 말이다.

권력은 그토록 떳떳하다면 왜 복면을 쓰고 시위를 하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그 질문의 전제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자신의 정보를 통제할 기본적 권리를 가진 이는 각각의 개인이지 국가가 아니다. 더구나 얼굴은 인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이고 식별이 용이한 생체 정보다. 그것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을 권리는 각자에게 있다. 얼굴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사진을 찍어 활용하겠다면, 국가는 더 나은 명분을 제시하고 사회 구성원을 설득해야만 한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내란이나 국가전복, 살인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위’만 처벌할 뿐 ‘음모’를 처벌하지 않는다. 심지어 복면을 폭력 시위의 음모로 볼 개연성도 빈곤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발의한 복면금지법안은 19대 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마스크를 벗기려는 권력의 시도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2016년 9월 12일 오전, 국회에서는 ‘백남기 농민 사태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가 쓰러진 지 304일째 되는 날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백남기 농민은 이미 회복 가능성이 낮고 수술도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여러 관계자들이 소환되었고, 날선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청문회장 한켠에 설치된 흰색 가림막 뒤에는 그 날 살수차에 올라 물대포를 쐈던 두 명의 경찰이 있었다.

지난달 12일 국회에서 열린 백남기 청문회에서 강신명 전 경찰청장의 의원들 질의에 대답하고 있다. 살수차를 운용했던 경찰관들은 뒷편 하얀색 가림막 안에 들어가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야당 의원의 질문은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가림막을 요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림막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저희 또한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격은 다시 이어진다. 국민에게 당당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가림막을 치신 것 아닙니까. 가림막은 언론에 노출을 안 하시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가림막 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가족, 집사람은 알고 있지만 저희 부모님이…. 그러나 의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굴이나 신상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림막을 요청한 것 맞잖아요, 맞죠?

그의 당당한 추궁은 권력의 질문 방식과 매우 닮아 있었다. 다른 의원은 가림막을 치워서 얼굴을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가림막 속에 숨은 경찰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윗선의 부당한 지시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강력한 질문이 쏟아져도 최대한 ‘안전’하게 사용하라고 교육받았다는 말만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그렇다면, 국가가 그들에게 가르친 ‘안전’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시민들은 복수에 나섰다. 쓰러져 피를 흘리던 백남기 농민의 몸에 쏟아지던 잔혹한 물줄기를 기억하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복수를 위한 무기로 사진을 사용했다. 가림막 속 경찰들의 얼굴 사진과 신상명세가 인터넷에 올려졌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사진들은 집요하게 그 경찰들을 추적하며 포위망을 좁히는 중이다.

그 사진을 퍼나르는 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믿는다. 그러나 감히 용기를 내어 말씀드린다. 사진을 무기로 사용하는 그런 싸움의 방식은 우리가 바라는 세계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피해자의 싸움이 가해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고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씀드리고 싶다.

김현호 사진비평가

공동기획 :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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