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불평등이 먼저인가 부패가 먼저인가…불평등이 부패를 초래한다

정원식 기자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

유종성 지음·김재중 옮김 |동아시아 | 420쪽/ | 2만3000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부패 수준이 낮을수록 좋은 국가라는 것은 두말이 필요없는 명제다. 그러나 부패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대답을 내놓는 것은 보기보다 어렵다. 우리는 흔히 가난하고 민주주의가 허약하며 권위주의적 정권이 들어선 국가일수록 부패 수준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유종성 호주국립대 교수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유 교수의 영어 논문을 단행본으로 다듬은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은 한국, 대만, 필리핀 등 세 국가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부패를 낳는 것은 불평등이며,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불평등이 심할 경우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보다 오히려 부패에 더 취약할 수도 있다는 점을 논증한다.

한국, 대만, 필리핀은 현대적 체제의 국가가 성립될 당시의 초기 조건이 유사한 국가들이다. 세 나라 모두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식민지배를 경험했고, 냉전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었다.

[책과 삶]불평등이 먼저인가 부패가 먼저인가…불평등이 부패를 초래한다

오늘날 이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국가는 필리핀이고, 가장 덜 부패한 국가는 대만이다. 한국은 필리핀보다는 낫지만 대만보다는 부패했다. 흥미로운 것은 종전 직후만 하더라도 세 나라 가운데 필리핀이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다. 1953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경우 한국이 1586달러, 대만이 1243달러였던 반면, 필리핀은 1730달러였다. 1950년 인구 1만명당 고등교육기관 입학률 비교는 더 극적이다. 한국과 대만은 각각 18명과 9명이었으나 필리핀은 그 몇 배가 넘는 88명이었다. 필리핀은 1950년 초등 및 중등 교육기관 입학률도 한국과 대만보다 높았다.

독립 직후 세 나라의 부패 수준은 비슷하게 심각했으나 1980년 초까지 필리핀은 부패가 증가한 반면, 한국은 약간 줄었고, 대만의 부패는 상당한 수준으로 줄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필리핀의 경제성장이 뒤처져서 더 부패해진 걸까. 그렇지 않다. 필리핀은 196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과 대만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다. 경제성장이 부패 수준을 결정한다면 필리핀은 한국과 대만보다 부패 수준이 낮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권의 성격은 부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는 부패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필수적인 것은 권위주의적 지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콴유의 주장은 필리핀 사례를 통해 간단하게 반박된다. 필리핀은 1972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가 시작된 이후에 부패가 늘었다.

특기할 점은 반대로 민주주의가 반드시 부패를 줄인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와 부패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민주주의 국가가 평균적으로 독재국가보다 부패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필리핀은 독립 초기에는 한국이나 대만보다 더 민주적이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 아니라 선거에 의한 권력 창출 시스템이라는 형식적 민주주의에 가깝다.

민주주의 정부는 어떤 조건에서 부패를 더 키울 수도 있다. 핵심적인 변수는 불평등 수준이다. “불평등 수준이 낮으면 민주적 제도는 부패를 줄어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불평등 수준이 높으면 부패에 대한 민주적 제도의 영향은 전무하거나 심지어 마이너스가 된다.”

민주주의가 부패에 취약해질 수 있는 건 후견주의와 포획의 가능성 때문이다. 후견주의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인들이 특정 유권자 집단에 당선 후 사적 이익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표를 얻는 행위를 말한다. 포획이란 소수 엘리트 집단이 사적 이익을 위해 정치인과 관료들을 포섭하는 행위를 뜻한다.

세 나라 간 비교연구에 따르면 불평등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치인과 관료는 부패에 노출되기 쉽다. 불평등이 심하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긴데,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조직화할 수단이 없어 정치인들은 정책 경쟁보다는 선심성 공약 경쟁을 벌인다. 또 불평등 수준이 높을수록 특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커지므로, 소수 엘리트들이 뇌물 등을 통해 부패를 키울 가능성이 커진다.

불평등이 부패 수준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독립 후 한국, 대만, 필리핀에서 진행된 토지개혁이다. 세 나라 모두 토지 지주계급이 부와 권력 지위를 독점했다. 한국은 1950년 토지개혁을 시행해 소작인들이 경작했던 토지의 89%가 소작인들에게 이전됐다. 대만은 1951년부터 경작 가능한 공공 토지를 소작농에게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는 개간된 전체 토지의 25%가 전체 농가의 48%에게 재분배됐다. 반면 필리핀은 1950년대 이후 대부분의 필리핀 대통령 후보들이 토지개혁을 약속했음에도 번번이 좌절됐다.

저자는 “부패가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 부패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부패 수준이 모두 심각했던 독립 직후 세 나라 가운데 한국과 대만은 토지개혁에 성공했으나 필리핀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나라 토지개혁의 성공 여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협의 수준에 달려 있었다. 한국과 대만은 북한과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 때문에 당시 우파 정치 엘리트들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토지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으나 인접한 공산주의의 직접적 위협이 없었던 필리핀은 개혁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소련과 체제 경쟁을 벌였던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불평등을 없앤다고 해서 부패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소득 불평등과 경제력 집중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부패를 줄일 수는 없다. 남은 문제는 불평등을 어떻게 줄일 것이냐다. 책에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 포함돼 있진 않다. 큰 정부가 부패를 유발한다며 민영화와 규제 완화 등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저자의 논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회적 함의는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정책적 노력 없이 부패 척결만을 외치는 이들은 실제로는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는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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