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연주하지 않고 기타로 산다

배순탁 입력 2016. 9. 2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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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함춘호는 묵묵히 구도자의 자세로 연주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랜만에 1990년대 가요 CD들을 쭉 둘러봤다. 음악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안에 쓰인 크레디트를 꼼꼼하게 되짚어보고 싶었다.

지금이야 다들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CD를 사면 크레디트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크레디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갈수록 간소화되어 앨범 단위로 적어놓은 경우가 많기에 곡별로 어떤 연주자들이 참여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을 뿐이다. 어쨌든, 크레디트를 보면서 내가 학창 시절 놀랐던 점을 떠올려봤다.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지망생이어서였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장 컸다. “뭐야, 이거. 기타리스트의 이름들 중 반 이상이 함춘호네. 누구지?”

함춘호. 1980년대 그룹 ‘시인과 촌장’의 멤버로 인기를 얻은 뒤 1990년대에 들어서 수많은 가요 앨범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날린 인물. 그는 적어도 국내에서 독보적인 장인급 연주자로 평가받는다. 만약 잘 모르겠다면 지금 당장 유튜브에 접속해서 그의 연주 동영상을 찾아보라. 수십 년 내공이 쌓아올린,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기타 플레이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당신과 내가 기타를 처음 잡았던 순간과 함춘호라는 미래의 장인이 기타를 처음 잡았던 순간은 대동소이했을 것이라고 애써 믿는다.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져 이제는 그 격차를 따라잡는 것보다 인류가 ‘은하철도 999’를 타고 은하계 끝에 가닿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을 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 격차에 대해 생각해본다. 정확하게는, 이 격차의 발생 원인을 따져보려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책 한 권을 떠올렸다. 바로 <장인: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다.

이 책을 쓴 리처드 세넷에 따르면, 장인은 ‘무언가에 확고하게 몰입하는 특수한 인간의 조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공들여 하는 일은 생활과 직결되어 있지만, 일을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공통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장인은 매일 자신의 손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특수한 사람이다. 생각한 뒤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할까.

책에서 강조한 열쇳말은 반복이다. 반복만으로는 부족하다. 요컨대, 반복을 통해 과연 무엇이 형성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장인들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이 있다. 기타 쪽에서는 이것을 ‘손맛’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함춘호의 기타 연주를 여러 번 듣다 보면 그가 기타를 친 곡이라는 정보를 듣지 않고도 “이거 함춘호 기타 연주 같은데?”라며 짐작할 수 있다. 연주에 자신만의 감각을 경유한 생명의 지문을 찍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장인급 연주자라고 칭하는 것이다.

‘무엇을 한다(do)’가 아닌 ‘무엇을 산다(live)’로

장인에게 일은 ‘좋아서 하는 것 그 이상’이 된다. 취향 이전에 습관인 것이다. 변함없는 습관은 우리의 생활을 앞으로 이끌어주는 주요한 동력이다. 취향은 때로 좌절하고 무너져도 습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은은하면서도 완강하게 삶의 이곳저곳에 배어 있는 까닭이다. 취향을 ‘무엇을 한다(do)’로, 습관을 ‘무엇을 산다(live)’로 치환해도 좋겠다.

그렇다. 장인에게 일은 곧 일 자체를 ‘사는’ 것이다. 속된 말로 물아일체의 경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함춘호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연주하는 것을 코앞에서 직접 보았다. 묵묵히 구도자의 자세로 연주했다. 음악 듣기 참 좋은 완연한 가을이다.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좋은 음악들을 감상하다 보면 비록 미세한 수준일지라도, 내 격차도 줄어들 것이다.

배순탁 (음악평론가ㆍ<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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