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자인가, 전범인가" 알자지라의 페레스 비판 눈길

강지혜 입력 2016. 9. 28. 19:42 수정 2016. 9.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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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AP/뉴시스】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 2월 8일 이스라엘 자파에 있는 페레스평화센터에서 포즈를 취한 고인의 모습. 2016.09.28
【예루살렘=AP/뉴시스】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93세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01년 10월 11일 페레스 당시 외무장관(왼쪽)이 예루살렘 의회에서 아리엘 샤론 당시 총리와 대화하는 모습. 2016.09.28

【서울=뉴시스】강지혜 기자 = 28일(현지시간) 별세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에 대해 저명한 원로 정치인이자 평화 중재자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지만, 일각에선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란 상반된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이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야론 에즈라히 정치학 교수를 인용해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수제자인 페레스가 대중의 관심 속에서 기나긴 정치 인생을 보냈지만, 그의 엄청난 성공담은 어둠 속에서 조작됐다"고 보도했다.

서구 언론이 페레스 전 대통령의 긍정적인 면을 주로 보도한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알자지라는 특히 이스라엘의 정치분석가인 로니 벤 에프라트를 인용해 "페레스는 분명 넬슨 만델라는 아니다"라며, 페레스가 '평화와 정의의 사도' 식으로 평가되는데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페레스는 국방부에 재직하던 1950~1960년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다. 강경파에 속했던 페레스에게 벤구리온이 부여했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비밀리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 작업에 반대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비밀리에 개발을 진행했다. 페레스는 개발을 마칠 즈음 프랑스와 영국, 노르웨이를 설득해 지원을 얻어냈다.

페레스는 그의 멘토였던 벤구리온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무기를 보유해야 미국과 아랍 국가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중동 정세에서 이스라엘이 '난공불락'의 지위를 가지려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알자지라는 팔레스타인은 물론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페레스를 호의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페레스의 이미지는 회복되기 어려운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에 페레스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정으로 명성을 얻긴 했지만 페레스는 정치 생활을 하는 동안 강경 매파에 속했던 전력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페레스는 1934년 가족과 함께 당시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키부츠에서 공동생활을 했으며 동유럽 출신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던 청년 시오니즘 노동자당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를 발탁한 벤구리온은 1948년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페레스를 막후 작업에 투입했다. 페레스는 이때 직접 전장에 나서지 않고 무기 구매 등을 담당했다. 불법으로 사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페레스의 외교적 수완은 국방부에 있었던 초기 몇 년 동안 길러졌다. 군사와 관련된 배경이 적었음에도 이스라엘 국방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자리자는 페레스가 1956년 자국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영국과 함께 이집트를 상대로 '수에즈 위기'를 모의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중동전쟁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이 시나이 반도에 침투했고 프랑스와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이들 3개국은 철수했다.

페레스는 1959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크네세트(의회)에 입문하게 됐다. 이후 48년간 의원으로 활동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의원직을 수행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속한 노동당은 점차 대중의 지지를 잃어 1977년 리쿠드당에 패배하게 됐다. 1948년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수많은 유권자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아슈케나지(중·동부 유럽 유대인 후손) 엘리트'라는 이미지도 페레스에 대한 이스라엘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슈케나지 엘리트가 현대 이스라엘을 세운 이유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비판이 나왔고, 아프리카나 아랍 국가 출신 유대인들을 무시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독립전쟁 당시 직접 전장에 투입돼본 적이 없는 페레스는 이츠하크 라빈이나 아리엘 샤론처럼 공적을 뽐낼 수도 없었다.

1984년 페레스는 총리가 됐지만, 연립 정부를 구성했던 리쿠드당의 이츠하크 샤미르 당수와 2년마다 교대로 총리직을 수행하기로 한 합의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알자지라는 지적했다. 페레스는 2007년 대통령이 된 뒤 정부 정책에는 별 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모셰 카차브 당시 대통령이 성폭행 혐의로 물러난 뒤 상징적인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페레스는 이스라엘 좌파 정치인들 사이에서조차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거나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로니 벤 에프라트는 "그는 완전히 자신의 명성과 위신에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며 "그의 정치에는 원칙이 부족했다. 그는 누군가의 뒤에서 음모를 꾸밀 거라는 인상을 풍기곤 했다"고 비판했다. 페레스와 노동당 당수 자리를 놓고 경합했던 이츠하크 라빈은 그를 "상습적으로 일을 꾸미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한편 페레스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당시에도 팔레스타인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치러온 전쟁의 연장선'이란 식의 입장을 취해 비판받은 바있다.

jhka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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