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날조기자로 공격하는 그들이 날조다"

2016. 9. 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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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위안부 증언’ 첫 보도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
“우익에 반박·투쟁의 기록” 책 한국어판 출간
“딸 살해위협 가장 화났다”…법원서 배상 명령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

25년 전인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 증언을 실명으로 보도해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하고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시킨 우에무라 다카시(58·사진)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책을 냈다. 26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열린 한글판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옮긴이 길윤형·푸른역사 펴냄·원제 ‘진실,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말했다.

“나는 날조를 하지 않았다. 니시오카 등의 주장은 역사수정주의 세력의 트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인터넷상에 퍼지고 나에 대한 증오가 확산됐다. 이에 대한 투쟁으로 니시오카 등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 중이다.”

올 3월부터 가톨릭대 초빙교수로 와 있는 그는 김학순 할머니의 뒤를 이어 잇따랐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명증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서장’ 기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당당히 밝혔다.

우에무라 교수는 자신의 책을 “우에무라 공격의 기록과 그에 대한 반증 등 투쟁의 기록”이자 “내가 지금까지 한국과 맺어온 관계를 담은 자서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25년 전의 그 기사 때문에 일본 내 우익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온 우에무라 교수는 특히 지난 2년 반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2014년 1월 말, 일본 대형 주간지 <슈칸분?>(주간문춘)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세력들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해 온 니시오카 쓰토무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대학 교수 채용이 확정된 우에무라의 그 기사에 “날조기사”라는 딱지를 붙이고 “잘못된 기사로 한일관계뿐 아니라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를 악화시킨 책임이 중대하다”며 ‘아사히’까지 공격하고 나선 이후다. ‘주간문춘’은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의 여자대학 교수로”라는 제목의 악의적인 기사를 내보냈고, 그때부터 “우에무라를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에서) 그만두게 하라”는 항의메일과 ‘살해’까지 공언하는 우익세력의 위협과 협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아사히신문사를 그만둔 뒤 공채 과정을 거쳐 2014년 4월 부임하기로 고용계약서까지 썼던 그는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퇴출’당했다.

지금 19살인 그의 딸은 당시 인터넷상에서 “이년의 애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고생을 했는가. (…)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여야 하지 않겠냐”는 폭언과 함께 “반드시 죽인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죽인다. 어디고 도망가더라도 죽인다. 기필코 죽인다”는 거듭된 “살해 예고”까지 들으며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간담회에서 우에무라 교수는 “이 부분이 가장 화가 난다”며 “딸 문제로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기사를 날조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공격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고 했다. 25년 전 그 기사가 일본군 위안부를 ‘정신대’ 이름으로 끌고갔다고 한 것, 강제연행이었다고 한 것, 김학순 할머니의 기생 경력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다. 우에무라 교수는 그 기사에서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돼 일본 군인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강요당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당시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여자정신대’라는 말이 ‘위안부’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고(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명칭이 그러하듯), 일본 학계나 언론 쪽에서도 ‘정신대’를 그런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었다고 우에무라 교수는 지적한다.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그는 ‘강제연행’이란 표현을 쓴 적이 없으며, 오히려 당시 강제연행이란 표현을 쓴 것은 <산케이신문>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14살에 기생권번에 팔려가 3년간 기생수업을 받다 끌려간 김 할머니가 밝히지 않은 그 사실을 쓰지 않은 게 무슨 문제가 되며, 게다가 설사 기생 출신이라 한들 그게 위안부 문제와 무슨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느냐고 그는 항변했다.

“너무나 사소한 것을 빌미삼아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저들의 수법 중 하나”라며, 그는 “그들이 붙인 날조라는 딱지야말로 날조”라고 말했다. “내가 날조 기자라면 <뉴욕타임스>가 왜 내 문제를 크게 보도하고, 유엔 ‘표현의 자유 담당자’가 어찌 나를 인터뷰하며, <한겨레>와 <동아일보>가 어찌 기사화하고 한국의 가톨릭대학이 나를 교수로 초빙했겠나?” 그는 “그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나 개인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자유언론을 압박해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아사히’조차 그런 문제를 예전처럼 많이 쓰지 않는다. 기자들이 예전에 비해 그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옅어졌다. 또 그런 기사를 쓰면 우에무라처럼 된다는 생각에 위축돼 있다.”

그는 그럼에도 “일본에서 여러 시민, 변호사, 학자, 저널리스트들이 ‘우에무라 공격’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라며 응원해주고” 있고, 한국에서도 후원 활동이 벌어지고 초빙교수로 불러주는 등 우익들 공격에 대한 항의와 반격이 확산되고 있다며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고 했다. 니시오카와 ‘주간문춘’, 그리고 그의 기사를 ‘날조’라고 계속 주장해 온 저명 우익언론인 사쿠라이 요시코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은 1년 반 내지 2년 뒤에나 최종 결론이 나오겠지만 조짐이 좋다. 지난 8월 초에는 딸 살해를 공언한 중년 남성에게 법원은 “미성년자에 대한 악질적인 인격공격”이라며 원고 쪽 청구대로 170만엔(약 1800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한국과는 여전히 온도차가 크지만, 일본에서도 상황은 바뀌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과거 잘못을 회피하지 말고 역사의 교훈으로 오래도록 기억함으로써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노 담화’ 정신을 계승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우에무라 교수는 재판 승리를 믿는다며 말했다.

“앞으로도 나는 일본과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진실로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다리 구실을 하고 싶다.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생각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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