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 남발..합의금 장사..'법폭'에 멍드는 사회

김흥록 기자 입력 2016. 9. 26. 18:40 수정 2016. 9. 2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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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혐의 댓글에도 "합의금 내놔라" 민사소송 제기 잇따라, 인터넷 이미지·폰트 사용 저작권침해 '기획소송'도 빈발, 부당이득 얻으려 법적권리 악용 '폭력 행사' 갈수록 늘어, 법원·검찰 '법폭' 자체기각 한계..근본적 해결책 찾아야
# 김상훈(가명) 씨는 지난해 한 유명인 A씨의 부도덕한 사생활 의혹을 제기한 기사에 댓글을 달았다가 모욕죄로 형사 고소를 당했다. 수사와 재판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김 씨는 무혐의 통보를 받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김 씨는 다시 송사에 휘말렸다. 똑같은 댓글을 이유로 A씨가 100만원 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낸 것이다. 김 씨는 “단순한 비판 댓글이라 합의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소송의 고통을 생각하면 앞으로 인터넷에 어떠한 글도 올리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김 씨와 같은 이유로 민사소송을 당한 이는 20명에 이른다.

# 이연희(가명)씨는 지난해 초 저작권법을 위반했다며 110만원에 합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2007년께 인터넷에 게시된 풍경 사진을 스크랩한 게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였다. 이 씨는 사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대응하지 않고 있었다가 실제 법원에서 150만원을 내라는 지급명령을 받고 부랴부랴 이의 신청을 했다. 이 씨는 “스크랩을 허용했던 8년 전 사진을 두고 지금에서야 저작권을 위반했다고 연락하는 걸 보니 덫에 걸린 느낌”이라며 “단 한 번의 경고 없이 압박하듯 합의금 장사를 하는 것 같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만약 소송의 진짜 목적이 합의금 장사나 입막음, 상대방 괴롭히기에 있다면 법은 이 같은 권리까지 보장해야 할까. 한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는 “고소·고발을 남발하거나 일부 로펌과 결탁해 부당한 이득을 얻으려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며 “주폭(酒暴)이 술의 힘을 빌려 폭력을 행사한다면 이들은 법의 힘을 빌려 폭력을 행사하는 법폭(法暴)”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정당한 법적 권리를 명분으로 법을 앞세워 부당한 목적을 이루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으면서 사회적 부작용도 만만찮게 나타나고 있다.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합의금을 요구받은 학생이 자살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고 김 씨처럼 죄가 없더라도 잇따른 소송제기에 지쳐 인터넷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포기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법을 악용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많은 분야는 저작권법이나 모욕, 명예훼손이다. 먼저 저작권법을 이용한 법폭은 이미지나 폰트를 다운받거나 이용한 이들을 찾아 저작권법을 위반했다며 통상 100만원 선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수법이 일반적이다. 일반인이 소송이나 고소를 피하려고 합의금을 내거나 폰트패키지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저작권을 가진 기업이 직접 고소하거나 합의금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법무법인에서 접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는 지방자치단체나 학교에서부터 계약직 사무보조사원이나 영세 식당 운영자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식당 운영자인 A씨는 인터넷에서 폰트를 내려받아 사용했다가 저작권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최근 30만원을 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 저작권자가 2010년 이후 제기해 판결에 이른 민사소송 수만 20건에 이른다. 판결 전 합의에 이른 건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저작권법 관련 합의금 장사는 7~8년째 이어지는 추세다. 2008년 저작권법 기획 고소·고발이 급증하자 검찰이 교육을 조건으로 기소유예하는 등의 대응 지침을 시행하면서 2010년부터 관련 사건 건수는 줄어든 모양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김가연 오픈넷 변호사는 “기소유예나 각하가 많아지면서 합의금을 노리는 이들이 형사 고소하는 대신 곧장 민사소송을 내고 있다”며 “이에 합의금 액수는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욕과 명예훼손은 대부분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이유로 고소하거나 고소를 빌미로 합의금을 요구한다. 이 역시 최근에는 형사소송 결과와 관계없이 민사소송을 내는 추세다. 일부는 욕설을 유도한 뒤 고소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구지방법원은 지난해 말 법폭 행태를 꼬집는 판결을 내기도 했다. 법원은 “유인한 원고에게 정신적 피해 생겼다고 할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감수하고 글을 게시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토론이나 의견을 표명하려고 글을 게시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을 자극해 모멸적인 표현의 댓글을 달게 하고 그를 이유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글을 게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담당 판사는 “불법을 유인한 자가 그 불법의 결과로 인한 정신적 피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권리남용으로 허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판결은 검찰이나 법원이 법 조항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고소나 소송의 취지 등을 살펴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법폭을 막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뜻깊은 사례다. 실제 이 판결 이후 대구지법의 또 다른 판사도 B씨가 낸 소송을 비슷한 이유로 기각했다. 검찰이 2008년 저작권사건에서 기소유예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뒤 고소·고발이 줄어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근본적으로는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법원과 검찰은 의도가 불순해 보이더라도 법에 맞게 판단하고 기소하는 게 본연의 임무인 만큼 확연한 문제가 없는 한 당사자의 법적 권리 등을 보장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불순한 의도와 정당한 권리의 기준을 잡기도 쉽지 않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지난해 말 고소 남발을 이유로 강용석 변호사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지만 내부 의견이 팽팽히 갈리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민은 국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19대 국회에서 저작권 합의금 장사를 막기 위해 피해액 100만원 이하의 저작권 침해는 형사처분 범위에서 빼는 내용을 담은 저작권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결국 폐기됐다. 범죄 여부를 금액으로 나눌 수 없다는 논리에 막혔다.

20대 국회에서는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저작권 고소 요건을 친고죄로 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제3자가 저작권자의 위임도 받지 않고 고발을 하겠다며 합의금을 거래하는 경우를 막기 위한 취지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 모욕죄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정확한 이야기를 올리거나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김흥록기자 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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