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트럼프 토론 결전 D-1..최대 승부처 역대 선례는

손미혜 기자 2016. 9. 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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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민주 양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 AFP=뉴스1

(서울=뉴스1) 손미혜 기자 = 미국 민주·공화 양당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가 26일(현지시간) 마침내 얼굴을 마주한다. 이번 1차 TV토론은 미국 대선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각종 토론 때마다 막말을 서슴지 않았던 '리얼리티쇼'의 귀재 트럼프가 클린턴과의 첫 정면대결에서 또 어떤 행보를 벌일지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물론이며, 미국 최초의 주요정당 여성 대통령후보인 클린턴이 토론장에 오르는 역사적 장관도 세간의 관심 중 하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고 있는 두 후보의 맞대결은 최대 1억명의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역대 1위 시청률을 자랑한 TV토론은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과 당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 간 토론으로, 8060만명이 시청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중 특히 후보 TV 토론은 이미지와 상징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후보들의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린다. 그렇다면 클린턴·트럼프 이전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각종 논란과 '교훈'을 가져온 대선토론에는 어떤 사례가 있었을까.

◇1960년 케네디 vs 닉슨

56년 전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맞대결은 대선 TV토론이 대선 판세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1960년 당시 케네디 민주당 후보는 젊고, 상대적으로 유명세도 떨어지는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에 불과했다. 반면 닉슨은 현직 부통령이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스튜디오 불빛 아래 당차고 굳건한 모습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반면 닉슨은 케네디의 젊은 혈기에 밀리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지를 망쳤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의 랜스 태런스는 "언론을 사로잡은 케네디의 '완벽함'은 여론조사에서 다소 뒤처졌던 그를 대선 승리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1976년 카터 vs 포드

케네디가 훌륭한 '토론가'의 본보기가 됐다면,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은 TV토론에서의 실책이 어떤 파문을 낳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타산지석의 사례가 됐다.

앨 고어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의 TV토론에서 반복적으로 한숨을 내쉬어 논란을 샀다면, 1976년 포드 전 대통령은 지미 카터 당시 민주당 후보와의 토론 과정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현실과 다른 대답을 내놓으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사회자가 포드 전 대통령의 말에 끼어들어 해명을 요구했지만, 포드는 실책을 시인하기를 거부했다. 포드는 대선토론을 상당히 잘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터와의 격차가 20%포인트(p)에서 6%p로 줄어드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고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2007년 오바마 vs 클린턴

때때로 대선토론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교훈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007년 민주당 경선 TV토론에서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외교정책을 두고 주고받은 문답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오바마는 클린턴을 향해 "다른 전제조건 없이 첫 임기 때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 쿠바, 북한 지도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날 의향이 있냐"고 물으며 "나는 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오바마는 "특정 국가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 처벌이라는 개념은 터무니없다"고 놀라울 만큼 솔직한 답변을 내놨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 말은 당시에는 실책으로 여겨졌지만,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 베네수엘라 지도부와 회동하고, 이란, 쿠바, 미얀마와의 관계개선을 이끌어내는 등 주요 외교적 성과를 성취했다.

◇1858년 링컨 vs 더글러스

제임스 조이스 작가의 '율리시스'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1858년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더글러스의 토론을 실제로 읽어내기보다는 역사적인 참고문헌 정도로 기억한다.

그러나 150년이 흐른 지금에도 7차례에 걸친 열띤 마라톤 토론은 정치적 논쟁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노예제와 전쟁, 윤리문제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한시간이 넘는 연설과 90분간의 반박, 또 30분간의 재반론에 이르는 숨막히는 토론을 이끌어갔다.

사실 링컨-더글러스 논쟁은 대선토론은 아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자리를 위해 맞부딛쳤다. 당시 링컨은 일리노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1860년 공화당 대선후보에 지명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yeou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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