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갯벌에 시체가 수북했지" 임씨 할머니의 눈물

주영민 기자 2016. 9. 1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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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폭격사건 피해자들이 전하는 그날의 기억 원주민 귀향 대책 마련 권고 나왔지만 정부 '외면'
월미도 폭격사건 피해자 임인자(81)씨. 2016.9.16 © News1 주영민 기자

(인천=뉴스1) 주영민 기자 = "옆집에서는 온몸이 불에 탄 삼남매가 서로 껴안고 타 죽었고, 월미도 갯벌은 시체가 수북했지. 그때 본 시체들의 모습과 마을에 진동했던 송장 타는 냄새가 지금도 생생해."

패색이 짙던 6·25 한국전쟁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이 올해로 66주년을 맞지만 승리 뒤에 가려진 또다른 비극 '월미도 폭격사건' 피해자들은 아직도 그날의 참담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월미도

1950년 9월 10일부터 5일간 미군이 무차별 폭격한 '월미도 폭격 사건'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는 임인자씨(81·여)는 당시 15살에 인천 이모집 심부름을 갔다가 월미도로 돌아오는 길에 폭격을 목격했다고 한다.

임씨는 "월미도 입구에 들어서니 저멀리 보이는 수많은 함대에서 엄청난 불꽃을 뿜어냈는데 그게 내가 살던 마을을 폭격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마을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폭격은 오후까지 계속 이어져서 차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임씨의 할머니와 부모, 세 동생은 무사했지만 이웃집들은 무차별 폭격에 생존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임씨는 "1945년에 부모를 콜레라로 잃고 17살 오빠와 12살 남동생과 같이 살던 이성례라는 친구가 옆집에 살았는데 그날 폭격으로 죽었다"며 "옆집에 온 몸이 불에 탄 삼남매가 서로 껴안고 타 죽어 있었다"고 말했다.

임씨 가족들은 그날밤 뗏목을 타고 영종도로 피난했다. 피난길에 월미도 갯벌에 방치된 수십구의 시체들을 목격했는데 그 시체들은 모두 미군 전투기가 발포한 기관총에 맞은 흔적들이 역력했다고 한다. 임씨는 그때 본 시체들의 모습과 마을에 진동했던 송장 타는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단다.

전쟁이 끝난뒤, 미군의 요새가 된 월미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임씨 가족. 그들은 월미도 인근을 주거지로 삼고 살았다. 25년전 어머니를 여의고 이제 혼자 살고 있는 임씨는 "생각해보면 폭격 이후 늘 떠돌이 인생이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전쟁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했지만 우리들은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존하면서도 죽기전에 월미도 고향마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임씨. 그러나 그의 고향마을은 이제 월미공원이 됐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소원

인천 월미도에 사는 한인덕씨(73·여)의 소원은 남편을 대신해 고향 땅을 찾는 것이다.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인 한씨의 남편(사망 당시 78세)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인천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한씨가 월미도와 인연을 맺은 건 1968년 월미도 출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1972년 월미도로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한인덕(73)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 2016.9.16 © News1 주영민 기자

폭격 당시 12살이었던 남편은 결혼 뒤에도 한씨에게 폭격과 관련된 이야기를 일절하지 않았다. 한씨가 이를 알게 된 건 한씨의 시아버지를 통해서였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2년 월미도 원주민들은 모임을 만들어 인천시 등에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진정을 냈다. 한씨의 시아버지도 그들 중 1명이었다. 한씨는 그때 제출한 진정서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당시 인천시는 주민들에게 "지금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그들이 철수하면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1963년에도 원주민들은 인천시에 재차 진정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폭격으로 집과 어선 등 전 재산을 잃고 고향마저 빼앗긴 원주민들은 월미도 입구에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미군이 철수하면 고향에 돌아가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1년 미군이 철수했지만 토지대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귀향은 불허됐다. 설상가상 1970년대엔 박정희 정권의 개발계획에 따라 판자촌도 철거됐다. 이후 원주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2001년 인천시는 국방부로부터 월미도 땅을 430여억원에 사들인 뒤 이 부지를 공원화했다.

한씨는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건 인천시가 월미도 땅을 매입해 공원화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1997년부터였다. 비록 유족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시아버지의 고향 땅을 정부와 미군에 의해 빼앗겼으니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관계된 일이었으니 한씨에게는 가족의 일이었던 셈이다. 80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대책위에 참여했다.

한씨는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남편에게 제대로 밥 한끼 챙겨주지 못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지 못했다"며 "남편이 아프게 된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너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그는 "치매까지 걸린 남편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농성장을 나갔다"며 "기억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데 고향을 찾겠다는 기억만큼은 놓지않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월미도 원주민이 1952년 인천시 등에 제출한 진정서.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제공) 2016.9.16 © News1

◇진실화해위, 귀향대책 권고했지만 정부 외면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폭격한 인천상륙작전은 국제법 등에 위반된 작전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의해 희생자와 쫓겨난 피해 주민들에게 합당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을 취하도록 권고했다. 국가기관 차원에서 이뤄진 최초의 진실규명이었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법적 근거 등이 없다는 이유로 권고를 외면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월미공원을 찾아 인천상륙작전의 폭격에도 살아남은 '평화의 나무'와 해군첩보부대 영령을 기리는 충혼탑 등을 둘러봤지만 월미도 원주민들은 만나지 않았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월미도 폭격 사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한씨는 "대통령께서 월미도 폭격에 살아남은 나무는 보고 갔다는데 폭격으로 고향을 잃은 우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며 "그동안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후회도 많았지만 월미도 원주민들의 억울한 한이 풀릴 때까지 이 일을 놓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ym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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