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논란' 속 강남역 피해자 가족은 뒷전

신혜정 2016. 9. 9.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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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

‘밤에 돌아다녀…’ 비난 시달려

남자친구 서명운동 중 돌 맞고

페미니스트 증명 요구까지 황당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 부모(앞줄)와 남자친구가 8일 경기도의 한 카페에서 피해자를 추억하며 얘기하고 있다. 어머니는“아직도 납골당에 가면 무릎을 꿇고 딸을 만난다”고 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굳어버린 딸의 몸을 끌어안고 계속 입을 맞췄어요. 그런데 아무리 달래도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감지 못해요. 얼마나 아팠으면, 얼마나 혼자 무서웠으면….”

인터뷰 내내 떨리던 손에 기어이 눈물이 번졌다. 5월 17일 새벽 서울지하철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딸 이은혜(가명)씨를 잃은 어머니 최미정(가명)씨는 심장이 깨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애써 기억을 떠올렸다. 8일 만난 최씨는 딸의 숨이 멎던 그 날, 아무 것도 모른 채 빨래를 하고 있었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여성혐오 논쟁’으로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넉 달이 지났다. 그 동안 피해자 가족과 남자친구는 지옥같은 시간을 견디며 조용히 싸워왔다. 범인 김모(34)씨가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이유로 감형되는 것을 막고 딸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서다.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엔 이씨의 희생을 애도하는 포스트잇 수천개가 붙었다. 그러나 추모물결이 무색하게 가족은 이내 딸의 죽음을 왜곡하는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밤늦게 돌아다녔으니 죽어도 싸다’ ‘못 배운 것들이 밤에만 다닌다’ 같은 언어 폭력은 자식을 떠나 보낸 부모의 상처를 헤집었다.

아버지 이성준(가명)씨에게 은혜씨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준 예쁜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야무졌던 은혜씨는 강원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살림살이가 떨어질까 세제부터 행주까지 일일이 챙겨 경기도 집으로 보냈다. 부부가 누구보다도 의지했던 딸. 그런 소중한 은혜씨를 잃고도 엄마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가해자를 엄중처벌해달라는 탄원서를 쓰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가족의 싸움은 외로웠다. 이씨는 “딸의 희생은 한낱 얘깃거리에 불과했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딸의 죽음을 놓고 논쟁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은혜씨와 가족은 철저히 소외됐다. 자식의 죽음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가족을 재단하기도 했다. 최씨는 “세 살 터울인 오빠가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기 위해 한 대학을 찾았다가 울면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범죄피해자 지원금이 가족에게 지급되자 일부 학생들이 ‘동생 팔아먹은 놈이 뭐 그리 당당하느냐’고 거리낌 없이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남자친구인 강현우(가명)씨도 엄청난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거동조차 불편했던 은혜씨 부모, 동생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는 오빠를 대신해 강씨는 사건 발생 이후 서명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강남역 추모현장에 얼굴을 비친 게 실수였다. ‘워마드’ 등 여성우월주의 커뮤니티 일부 회원은 강씨를 미행한 뒤 그의 집 문 앞에 ‘남자친구를 사칭하지 말라’며 욕설이 담긴 메모를 남겼다.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에 찍혀 한때 은혜씨의 남자친구로 알려졌던 남성이 대학선배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짜 남자친구’라는 낙인이 강씨에게 찍혔기 때문. 어떤 이들은 ‘일간베스트저장소’등에 올라온 강씨 얼굴을 알아보고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서명운동 도중 돌을 맞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더욱 답답한 건 그에게 ‘페미니스트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몇몇 이들의 태도였다. 강씨는 “내가 아닌 은혜를 위해 서명을 해달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와는 상관없이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는 편가르기로 사안이 변질됐다”고 말했다.

어머니 최씨는 “서로 싸우지 말고 우리와 함께 울고 공감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버지 이씨는 “범행 동기가 여성혐오든 아니든 딸의 죽음은 바뀔 수 없는 현실”이라며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가 제대로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도움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씨는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피의자 김씨의 2차 공판에 나가 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증언할 참이다.

글ㆍ사진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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