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일반적으로 서예라 한다면 이 쓰기의 기본단위는 획(劃)이라 할 수 있다. 필획(筆劃)이란 붓으로 쓴 획을 말한다. 서예작품을 보고 ‘힘이 있다’ 라고 흔히 말하는 그 부분은 바로 필획에 대한 시각적인 느낌이다.
한편의 서예작품이 여러 필획들 간의 관계로 이루어 져 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필획이 전체의 관계에 함몰된다는 뜻은 아니다. 전체를 위하여 개별 획이 희생되는 일은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필획이 각자 뚜렷한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난 후에야 주변과 조화될 수 있다는 그런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화합(和)하되 같은 것(同)이 아니다’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까닭에 앞서간 많은 서가(書家)들은 필획들이 화합하는 것에도 고민이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개별 필획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과 삶에 대한 끝없는 사유를 이 필획위에 투영하려 하였다. 추사선생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선생이 남긴 많은 작품들 가운데 세월의 시기에 따른 필획의 변화만으로도 이 같은 고민을 추측할 수 있고 이는 추사서예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부언하자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유의 대상은 필획의 형태도 아니고 문자의 한 요소도 아니다. 그것은 필획의 느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노래하는 사람이 목소리의 느낌 대하여 어떻게 표현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추사의 작품 ‘五岳圭楞河勢槪 六經根柢史波瀾(오악규능하세개 육경근저사파란)’에서 그 한 예를 살펴볼 수 있다.
다음 두 작품이 있다. 좌측은 젊은 靑篆山人(청전산인)시절 작품이고 우측은 그로부터 30년 후 勝蓮老人(승련노인)시절 작품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생이 동일한 내용의 두 작품을 세월의 간극을 두고 제작한 결과 필획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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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젊은 靑篆山人시절 작품, <그림 2> 30년후 勝蓮老人시절 작품 (추사 김정희 작 《五岳圭楞河勢槪 六經根柢史波瀾》오악의 산세는 황하의 흐름을 바꾸게 하고 육경에 근거한 문장은 역사에 파란을 일게 하는구나. |
좌우 두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필획의 차이이다. 필획의 형태가 아니라 선질(線質)에서 보여주는 질감과 그로부터 나오는 감흥이 다른 점이다. 필획에서 이 정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글씨를 쓰는 순간에 발현되는 감정의 차이라기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천착해온 필획에 대한 내면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
그 차이는 직접 보고 느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점이 있지만 굳이 언급해보자면 우선 운필의 차이가 있다. 좌측은 붓끝을 드러내고 있는 운필이며, 우측은 붓끝이 감추어진 운필이다. 그 결과 좌측은 힘차고 윤기(潤氣)있고 분명한 형태를 나타내는 반면 우측은 뭔가 불분명하고 투박하면서 윤기보다는 삽기(澁氣: 종이와 붓의 마찰에 의한 까칠한 느낌)에 가깝다. 이렇게 본다면 우측이 좌측보다 테크닉이 떨어진 상태로 보이지만 사실은 우측이 좌측보다 그 미감의 깊이로 볼 때 몇 수는 앞선다. 다하지 않음으로 해서 더 많은 표현을 할 수 있는 것, 동양에서 예술적 미감은 일관되게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필획(筆劃)에는 5가지 기본 조건이 있다
필획에 대한 서가(書家)들의 인식은 각자의 기준이 있어 각각의 얼굴이 다른 만큼이나 관점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필획이 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공통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글씨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왔다. 그 기준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필획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고전적으로 통용되어온 기준은 “신(神)/기(氣)/골(骨)/육(肉)/혈(血)” 다섯 가지 조건이 그것이다. 북송의 소식(蘇軾, 東坡)이《論書(논서)》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 원문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書에는 반드시 신(神)/기(氣)/골(骨)/육(肉)/혈(血) 이 있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書가 될 수 없다”
옛 선인들은 이 다섯 가지가 각각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붓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사실까지 기술해놓았다. 필자는 이 내용에 동의하며 필획을 이해하는 기본바탕으로 삼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神이란 정신이 되며 획의 표정을 만들어내고, 氣와 骨은 필획에 강하고 굳셈의 골기가 있는 것은 마치 인체에 기골이 있는 것과 같고, 肉과 血은 인체에 근육이 있고 혈액이 순환되어 피부가 윤택하듯이 필획에도 살아있는 피부의 윤택함이 있어야 한다. 획 하나에 기세가 있고 뼈대가 있고 근육이 있고 혈액이 순환되는 피부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갖추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붓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역할이 따로 있어 각자의 역할이 잘 발휘되도록 붓을 사용해야 한다. 힘찬 획은 ‘붓의 허리’(호심 豪心)에서 나오고, 윤택한 피부 같은 우아함은 ‘붓의 끝’(필단 筆端)에서 나온다. 호심(豪心)을 잘 사용하지 못하면 필획에 힘이 없고, 필단(筆端)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필획은 억세기만 하다. (당태종의《指意》 참조).
획이란 살아있는 생명체로 느껴져야 하였다. 한갓 선(線, line)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을 붓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선이라는데 머무르지 않고 생명의 기운으로까지 사유를 진행해 왔다. 이는 사혁(謝赫)이 말한 기운생동(氣韻生動)과 상통한다. 즉 그려낸 대상의 ‘기와 운이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동양예술 최고의 화두로 삼고 있는 이 경지도 역시 가장 기본단위인 필획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된 이후에야 논할 수 있는 경지라 본다.
필획(筆劃)은 화면에서 하모니를 이룬다
하나의 필획은 하나의 氣(생명의 에너지:氣勢)를 가지고 있다. 필획은 따라서 하나의 에너지가(價)를 가진 독자적 존재로서 주변과 관계하여 조화를 추구한다. 한 편의 글씨가 있는 화면은 필획이 모여 문자가 되고 문장이 된다. 동시에 이 화면은 여러 획이 모여 서로 관계를 맺는 장(場)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화면에서 하나의 필획은 마치 음악에서 하나의 음표와 같다. 서로 다른 음이 모여 화음을 이루는 현상이 글씨의 화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필획은 기(氣)가되고 울림은 운(韻)이된다.
기와 운의 실체에 대해서는 누구 할 것 없이 모호한 입장이다. 그러나 유독 추사선생은 화면에서 기와 운의 관계에 대하여 명료하게 정리고 있다. 기세는 흉중에 있다가(氣勢在胸中) 글자 속의 획과 획 사이에 또는 글자 사이사이의 행간에 흘러 넘치는 것(流露於字裏行間),,,그래서 점 획 위에서만 기세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필획에서 발생한 기세가 어떻게 울림이 되는지의 그 과정을 밝혀놓고 있다.
以勁利取勢 굳세고 좋은 것으로 세를 취하고
以虛和取韻 빈 곳에서 어울림으로 운을 취한다.
기세는 힘차고 좋은 획에서 얻는다. 그렇게 발생한 기세는 획이 밀집된 곳(虛實의 實한 곳)에서 증폭된 후 최종적으로 획이 성근 곳(虛實의 虛한 곳)으로 모인다. 기세는 여기서 머물며 마침내 서로 섞여 울림이 되니 이를 하나의 운(韻)이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화면을 만날 때 비로소 음악을 느낄 수 있다. 필획과 공간이 만든 울림이다. 앞서 언급한 神氣骨肉血 다섯 가지가 필획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면 韻이 되는 경지는 필획의 최종경지라 할 수 있다.
기세의 발생과 운의 느낌에 대하여 아래 《불이선란도》에서 그 한 예를 살펴볼 수 있다. 필획이 강한 곳, 밀집된 곳에서 발현하여 필획이 성근 곳, 빈 곳으로 모여 울림이 된다. 큰 획은 강한 음이 되고 작은 획은 잔잔한 음악이 된다. 시각이 청각으로 느껴지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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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 작《不二禪蘭圖》 54.9 X 30.6, 연대미상) |
점(點)을 변화 있게 쓰지 않고 같은 형태로 나열하기만 하면 바둑돌을 포석해 놓은 것처럼 되고, 획을 변화있게 쓰지 못하면 산가지를 흩어놓은 것이 될 뿐이다. 모난 필획(方)을 변화없이 중첩하게 되면 말(斗)을 엎어놓은 꼴이 연출되고, 둥근 필획(圓)을 변화 없이 계속 반복되면 둥근고리(環)만 만들어진다. 결국 이와 같이 다르게 하지 않고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되면 음악과 같은 울림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點不變 謂之布碁 劃不變 謂之布算 方不變 謂之斗 圓不變 謂之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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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작 《彩筆名花》 137 X 33.3 1856년 無雙彩筆珊瑚架 第一名花翡翠甁 더 없이 좋은 붓에 산호 붓걸이 제일가는 이름난 꽃에 비취꽃병) |
아래 작품 행서대련《彩筆名花》은 강한 필획과 약한 필획이 격차가 심하게 관계하고 속도가 빠르고 경쾌한 획과 느리고 무거운 획이 큰 차이로 존재하여 경쾌하고 화려함이 있다. 추사의 간찰에서는 자주 보는 현상인데 대련작품과 같이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반면에 아래 《大烹豆腐》은 예서필획이면서 대소 강약의 격차가 매우 적은 필획들이 관계하고 있다. 선생이 고예(古隷)를 좋아한다는 점이 이런 현상을 드러낸다. 필획에 강약변화가 거의 없는 무덤덤하고 졸박한 미감을 선호하는 점이라 할만하다.
이 두 작품은 모두 71세 과천에서 쓴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만년에 무르익은 선생의 필획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한 작품은 화려함을 구사하고 있고 또 한 작품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무심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이끌게 된 요인은 아마도 그 작품의 내용이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위 행서대련《 彩筆名花》은 문구 내용을 보면 “더없이 좋은 붓에 산호 붓걸이 제일가는 이름난 꽃에 비취꽃병”이라 한다. 아름답고 화사함이 없을 수 없다. 반면에 아래 작품 예서대련《大烹豆腐》의 내용은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라네” 라 하며 이 작품에 쓴 방서에 “촌부의 가장 즐거운 일”이라 하고 있지 않는가? 이보다 더 소박할 수는 없다.
그 내용에 부합하는 필획이란 역시 꾸밈이 없는 천연의 필획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만년에 선생의 필획에 세련미가 없다고 하는 평이 있기도 하지만 테크닉의 세련미가 촌로의 소박한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극도의 세련미는 어눌함과 오히려 통한다. 마치 초보자의 필획처럼 보이지만 일체의 기교를 배제한 이런 필획을 써 놓고 선생은 흡족해 하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서가들은 이런 경우 버리고 다시 쓸 것이다. 좋다고 하는 경지가 다른 것이다. 이것이 그 사람의 공력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이런 만년의 시기에 화려함을 표현한다면 어느 정도일까? 바로 위 작품 《행서대련 彩筆名花》이 그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화려함이 오히려 허허롭다.
필획(筆劃)은 치열한 사유(思惟)의 표현이다
필획에 대한 사유는 서예 표현의 원천에 대한 사유이며 주관적 미감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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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작 《大烹豆腐》 129.5 X 31.9 1856년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라네 |
추사는 30년 전에 쓴 이 작품을 보고 그 필획이 맘에 들지 않았으리라. 예전에 보았던 소재 옹방강(蘇齋 翁方綱 1733~1818), 석암 유용(石庵 劉墉 1719~1804)의 글씨에서 느꼈던 그런 감흥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그때 받았던 번쩍이던 신광(神光)은 가슴속에서 더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필획에 대한 끝없는 사유를 그만둘 수 없었던 까닭이 아마도 여기에 있다고 고백하는 듯 하다. 그 작품의 방서에 이렇게 써 넣었다.
소재 석암이 둘다 이 구절을 쓴 것을 예전에 본적이 있다. 비록 삼십 년이 지난 후인데도 오히려 신광(神光)은 눈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겠도다. 감히 망령되게 그를 쫓아 따라 써 볼 뿐이다.
(曾見蘇齋石庵 所寫皆此句 雖三十年後 尙覺 神光 在眼匪 敢妄摹追耳)
이당 조카의 부탁으로 써 준다 (怡堂賢姪屬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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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백 박덕준 |
서법가로서 현재 거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추사 김정희의 필묵법을 복원하여 계승 발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한자의 축소 생략원리와 초서의 기원을 탐구하여 초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2008년부터 2년마다 개인전을 열어 2014년에 제 4회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전라북도 세계서예비엔날레 본전시 초청(2007), 국제서법가협회전(2013 광주), 강암연묵회(2015 전주) 등 단체전에 참가하고 있다. 저서에, 추사의 필묵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필묵법 지침서로 정리한 “필묵법산고”(筆墨法散稿 2012 삼근재)가 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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