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오늘.. "한국피겨퀸의 탄생"

진경진 기자 2016. 9. 5.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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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오늘]'피겨여왕' 김연아, 선수 시절 내내 역사 써내려가

[머니투데이 진경진 기자] [[역사속오늘]'피겨여왕' 김연아, 선수 시절 내내 역사 써내려가]

'피겨여왕' 김연아가 러시아 소치 올림픽 당시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갈라쇼 무대에서 가수 에이브릴 라빈이 부른 존 레논 원곡의 ‘Imagine(이매진)’에 맞춰 아름다운 연기를 펼치고 있다. ./사진=뉴스1

'세렌디피티'(serendipity) - 우연을 붙잡아 행운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

'피겨 여왕' 김연아는 자서전 '7분의 드라마'에서 피겨와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곱 살 꼬마였던 김연아는 언니와 함께 엄마 손을 잡고 집 근처 새로 문을 연 과천 빙상경기장을 찾았다. 처음 신은 스케이트화가 낯설어 계속 빙판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것도 너무 즐거웠던 김연아는 엄마를 졸라 스케이트를 배우기로 했다.

우연을 행운으로 잡은 순간이었다. 정규 강습이 끝날 무렵 김연아를 가르쳤던 코치가 어머니를 찾아왔다. "연아에게 재능이 있습니다." 그 길로 개인 교습이 시작됐다.

김연아가 9살이 되던 해 1998년 일본 나가노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한 외국 선수가 김연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지금은 '피겨 전설'이 된 중국계 미국인 미셸 콴이었다. 김연아는 콴의 표정과 동작을 흉내냈다.

김연아는 끊임없이 연습했다. 자서전에선 "오늘 성공하지 못하면 집에 안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 이미 초등학교 시절 6가지 점프 기술 중 악셀을 제외하고 5가지 트리플 점프를 뛸 수 있었다.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일본)가 등장한 것도 자극이 됐다.

그 결과 국제빙상연맹(ISU) 비공식 국제대회인 트리글라브 노비스에서 우승(2002년), 크로아티아 골든베어 대회 노비스 부문에서도 우승(2003년).(노비스는 주니어보다 한단계 낮은 등급이다.) 2003년엔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리고 2004년 9월5일. 김연아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ISU 2차 주니어그랑프리피겨대회에서 우승했다. 나이가 어려 1차그랑프리에 나가지 못한 그는 첫 출전한 2차그랑프리에서 완벽한 트리플 점프로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모두 1위를 석권했다.

1908년 국내에 스케이팅이 처음 도입된 이래 피겨 종목에서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성인대회와 주니어대회를 통틀어 김연아가 처음이었다. 더욱이 남녀 통틀어 국내 피겨선수가 100여명도 안되는 국내 현실에서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김연아는 그 해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5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금메달, 2006년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한국 피겨 역사를 새로 썼다.

하지만 무릎, 관절, 허리 등 온 몸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특히 2006년 주니어 선수권대회를 앞두고는 발에 맞는 부츠가 없어 은퇴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김연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8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선 고관절 통증 진통제 주사를 맞고 경기에 나가 2년 연속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2008-2009 시즌에는 부상 없이 대회에 나서 그랑프리 2개 대회 우승과 그랑프리 파이널 준우승, 2009년 4대륙 선수권대회와 세계선수권대회를 휩쓸었다.

특히 세계선수권대회에선 총점 207.71로 우승하면서 ISU가 도입한 신채점방식(뉴저지시스템)에서 처음으로 200점대를 돌파한 여자 싱글 선수로 기록됐다.

올림픽 시즌에 들어간 김연아는 2009년 10월 시작한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2개의 금메달을 휩쓸었고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2월 밴쿠버 올림픽에선 절정의 기량으로 역대 최고점 금메달의 역사를 쓰기도 했다.

김연아가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펼치고 있다./사진=뉴스1

김연아는 밴쿠버 올림픽 이후 은퇴를 고민했다. 어렸을 때부터 '밴쿠버 올림픽이 끝이다'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김연아는 벤쿠버 올림픽이 끝난 후부터 '더이상 하기 싫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창올림픽 유치전을 마치고 다시 빙판에 복귀했다. 후배들을 위해서였다. 김연아는 2013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총점 218.31점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복귀전을 치렀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 티켓 3장을 따냈다.

한국 피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덕분에 '김연아 키즈'인 김해진과 박소연이 올림픽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쇼트프로그램에서 시즌 최고점인 74.92점으로 1위에 올랐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토니코바에게 석연찮은 판정으로 아쉽게 은메달을 따내면서 선수 인생을 마무리했다.

이제 김연아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IOC 선수위원이다. IOC 선수위원은 국가 당 1명이 원칙이다. 최근 탁구 유승민(34)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김연아가 직접 출마를 할 수는 없게 됐지만 IOC위원장의 추천으로 뽑는 선수위원 3장의 카드가 남아있어 많은 이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

김연아는 현재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약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부를 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포브스는 최근 아시아에서 영향력있는 30인에 김연아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진경진 기자 jkj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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