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그땐 사람 귀한 줄 몰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교실을 생각하면 콩나물시루가 떠오른다. 70명 넘는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매월 등교시간도 달랐다. 어느 달은 아침에 학교를 갔고, 어느 달은 오후에 갔던 기억이 난다. 2부제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많은데 교실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학생이라도 오면 책걸상 놓을 데가 없어 쩔쩔매던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좋은 건지를 몰랐다.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감옥에 있을 때의 참기 힘들었던 고통 중 하나로 동료 죄수들과의 ‘살 부대낌’을 꼽았다. 무더운 여름, 좁은 감방에서 재소자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고 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한겨울의 차디찬 방바닥 냉기를 옆 사람의 체온으로 버텨낸 것이다.
여기 충격적인 통계들이 있다.
①소설가 조정래씨는 얼마 전 출간한 ‘풀꽃도 꽃이다’에서 지난 15년간 성적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80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그는 “연평균 533명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우리 군인 숫자는 5099명으로 추산된다”고 비교했다. ②석 달 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 청년이 열차에 치여 숨졌다. 이렇게 지난 한 해에만 근로자 1810명이 산업현장에서 사라졌다. 하루 5명꼴이다. ③대한민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한 지가 12년이나 되자 이 무서운 숫자에 대부분 둔감해졌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간 집계된 우리나라 자살자는 7만3995명. 이라크전쟁 사망자 3만8625명의 약 2배이며, 아프가니스탄전쟁 희생자 1만4719명에 비하면 5배에 달한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 ‘사람 귀한 줄 모르는 풍조’가 만연해 버렸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런가 보다 한다. 세계 최저인 출산율을 높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불필요한 ‘생명 누수(漏水)’를 막는 일인데도 말이다. 아기를 더 낳게 하기 위해 151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정작 이웃의 생명은 도외시돼 왔다.
이런 점에서 지방의 작은 도시 하나가 이룬 ‘기적’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 도시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우울증 전수조사를 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할아버지, 할머니를 집중적으로 돌봤다. 공무원, 자원봉사자들을 ‘생명사랑지킴이’로 보내 주기적으로 멘토링 활동도 벌였다. 우울, 불안, 분노, 적대감 등으로 인해 학교와 가정에서 아픔을 겪고 있던 청소년에게는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적용했다. 그랬더니 2014년 인구 10만명당 46.2명이었던 자살률이 지난해 28명으로 40%나 뚝 떨어졌다. 충남 보령시 얘기다.
이젠 나라 전체가 나서 학교에서 죽어 나가는 아이, 산업재해로 사라져 가는 근로자, 가정과 회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까지, 줄줄이 새는 생명을 차단해야 한다. 지금처럼 무관심하게 산다면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주변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다. 콩나물교실이 그리운 시절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굼뜨면 우선 우리끼리라도 서로를 챙겨보자.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가족, 학교 친구, 회사 선후배 다 대상이다. 얼굴 기색도 살피고 기분도 물어보며 살뜰히 보듬어야 생명 누수를 막을 수 있다.
삶은 부대끼는 게 좋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8월 만원 지하철과 버스에서 옆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면, 추운 겨울에는 그의 체온이 고맙게 느껴질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 사람 귀한 줄 알았더라면….” 후회하면 늦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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