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사고 났다" 해서 나갔더니 500쪽짜리 영장이..

입력 2016. 8. 31. 19:06 수정 2016. 8. 3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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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누리집 ‘노동자의 책’ 운영자 이진영씨가 겪은 ‘간판 없는 보안수사대’

70·80년대 사회과학책 누리집에 올리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새벽에 압수수색
클라우드 파일·메신저·메일까지 낱낱이 털어
창문도 없는 밀실 네댓평 조사실서 취조

이진영 ‘노동자의 책’ 대표가 수사받은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4대. 이 건물에는 경찰기관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나와보세요.”

지난 7월26일 아침 6시,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이진영(49)씨 가족의 아침잠을 깨웠다. 문을 열고 나가자, 경찰관 9명이 500여쪽짜리 압수수색 영장을 들어 보였다. 영장에는 이씨가 ‘반국가단체나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선동한 자’ ‘이를 목적으로 표현물을 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적혀 있었다. 한국철도공사 직원인 이씨에겐 졸지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란 낙인이 찍혔다.

2009년부터 취미 삼아 ‘노동자의 책’이란 이름의 누리집을 운영하며 올린 각종 게시물이 빌미가 됐다. 이씨는 1970~1980년대, 대학생 등이 숨죽여 읽던 각종 사회과학 서적들을 전자책으로 만들어 누리집에 올렸다. <강철서신>이나 <실천문학> 등을 비롯해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은 책과 잡지 3700여권을 정리한 것들이다. 인터넷 포털에 공개된 이 누리집에 회원으로 가입한 1500명은 “대부분 책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공부하려는 이들”이다.

압수된 책과 컴퓨터 하드디스크, 유에스비(USB) 등과 함께 이씨는 경찰 승합차에 올랐다. 한참을 달려 서울 신촌의 후미진 골목으로 접어든 승합차는 이화여대부속초등학교 앞 노란색 2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굳게 닫힌 검은색 철문 뒤로 빛바랜 태극기 하나가 펄럭였고, 건물 옆엔 1970년대 거리에서 봤음 직한 붉은색 글씨체로 ‘설렁탕’이라고 적힌 가게가 있었다. 경찰은 그곳이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보안수사4대라고 했다. “뭔가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신촌에 그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경찰은 이씨를 1층 ‘조사실’로 데려갔다. 창문도 없는 네댓평짜리 조사실은, 말 그대로 ‘밀실’ 같았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이씨와 마주 앉은 경찰은 “디지털포렌식을 하겠다”며 이씨의 하드디스크를 놓고 ‘계급’ ‘혁명’ ‘사회주의’라는 키워드를 넣어 파일을 검색했다. ‘사상 점검’도 이뤄졌다. 경찰은 이씨가 누리집에 올린 책이나 문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 책이 사회주의 폭력혁명과 체제 전복을 고취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느냐” “(이런 내용이 담긴 책을) 배포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자본론>이나 <노동의 새벽> 같은 책을 들고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이야기할 때는 어이가 없더라고요. 집 앞 도서관에도 비치된 책들인데, ‘잘못된 사상’을 가진 제가 지녔기 때문에 문제라는 식이었어요.”

경찰은 이씨가 ‘파업을 하고 징계를 받았다’고 초등학교 동창과 메신저로 나눈 글을 비롯해 파일관리용 서버에 올린 사진파일, 노동자의 책 누리집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문구 등을 들이밀며, 이적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자체 인지를 통해 수사에 착수했으며,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합법적으로 이런 증거를 수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지는 보안 수사의 특성상 밝힐 수 없다”는 게 경찰의 얘기다. “영장 집행 과정을 전혀 알지 못했거든요. 경찰이 온라인상의 내 흔적을 낱낱이 파악해왔다는 사실에 순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이씨의 집 지하실에 꾸려진 노동자의 책 작업실 벽면 책장에는 지금도 책 3천여권이 어지럽게 들어차 있다. “저는 사회주의를 지향해요.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책을 읽고 알릴 자유조차 억압받아야 하는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글·사진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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