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만에 멈춘 '수송보국' 한진해운의 꿈

입력 2016. 8. 31.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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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모태기업 법정관리行
[동아일보]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 로비에 전시된 한진해운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한진 수호’의 모형.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66년 6월 어느 날. 조중훈은 베트남 퀴논 항에서 미국 화물선의 하역을 지켜보며 넋을 잃었다. 눈앞에선 거대한 갠트리 트레인이 화물선에서 기관차 만한 철제 궤짝을 하나씩 부두에 내려놓고 있었다. 컨테이너 한 개의 무게는 40t에 달했지만 부두로 옮기는 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열두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물량을 그 짧은 시간에 옮기다니!’ 충격이었다.(중략) 조중훈은 귀국하자마자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한진그룹 고 조중훈 창업주의 일대기를 다룬 ‘정석 조중훈 이야기, 사업은 예술이다(이임광 저)’의 한 대목. 당시 46세이던 조 창업주는 컨테이너 하역 광경에 반해 한진해운의 전신인 대진해운을 세웠다. 조국을 수송업으로 일으켜 세우겠다는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꿈이 시작된 순간이다.

조 창업주에 이어 고 조수호 2대 회장, 최은영 3대 회장(조수호 회장 부인), 그리고 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으로 경영권이 이어지는 동안 한진해운은 여러 번 파도를 만났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 파란만장 역사 끝 ‘부서진 꿈’

한진해운의 역사는 조 창업주가 해운업에 뛰어든 1967년부터 시작된다. 조 창업주는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노르웨이에서 1만2000t급 화물선을 들여와 ‘오대호’라 이름 붙이고 한국-미국-일본 정기 항로에 투입했다.

1972년 1차 오일쇼크로 회사가 해체됐으나 조 창업주는 1977년 한진해운으로 다시 회사를 세웠다. 성장을 거듭한 한진해운은 1992년 국적 해운사 중 최초로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한진해운을 이어받은 조 창업주의 3남 고 조수호 전 회장은 글로벌 기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1994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조 전 회장은 취임 3년 만에 서비스 지역을 태평양, 대서양, 지중해, 인도양으로 넓히고 남미 항로도 개척했다.

2006년 조 전 회장이 지병으로 별세하면서 위기가 드리웠다. 조 전 회장의 부인 최은영 전 회장이 2007년 경영권을 넘겨받았지만 글로벌 해운 경기 불황으로 한진해운의 실적이 악화돼 2013년부터 3년 연속 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조 창업주의 장남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4년 회사 지분과 경영권을 제수에게서 넘겨받으며 구원투수로 나섰다. 대표이사 자리에 올라 ‘무보수 경영’을 선언하고 그룹 차원에서 1조2000억 원의 유동성을 지원하는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 정부의 정책 실패와 대우조선해양 악재

현대상선과 달리 한진그룹의 경영 정상화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 채권단의 지원 중단 배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한진그룹은 “이미 상당한 규모의 유동성을 한진해운에 지원했고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이 1100%에 달한다”는 점을 내세워 내년 말까지의 부족 자금 1조∼1조3000억 원 중 5000억 원만 마련했다. 한진 측 관계자는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정책 실패와 대우조선해양 사건도 한진해운 법정관리의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도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해운 강국들은 서둘러 국적 해운사에 유동성을 공급했고 이를 무기로 해운사들은 대형선박을 확보하며 덩치를 키워나갔다. 당시 한국 조선소에서 싼값에 대형컨테이너선을 사들여 원가 절감에 성공한 외국 해운사들은 운임을 낮출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외국 해운사들에 “한국 조선소에 발주를 해달라”며 금융 지원까지 해줬다. 반면 한진해운 등 국적 해운사에는 ‘빚 줄이기’만 강요했다. 결국 정부 지원 없이 자력으로 버티던 한진해운은 외국 해운사들에 운임 경쟁에서 밀려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우조선 사태도 발목을 잡았다. 금융권은 대우조선 4조2000억 원을 비롯해 조선업계에 10조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으나 방만 경영으로 혈세만 날렸다는 비난 여론에 시달려 왔다. 결국 조선산업에 너그러웠던 잣대는 해운업에는 엄격한 기준으로 바뀌었다. 채권단이 조선업에 투입했던 자금 중 1조 원만 지원했더라면 해운산업이 이런 사태로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이제 ‘때늦은 후회’가 되고 말았다.

이은택 nabi@donga.com·김성규·박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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