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은 언제, 어떻게 '현모양처' 대표주자가 됐나

2016. 8. 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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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어진 어머니'+'착한 아내' 완성…말기엔 '군국의 어머니'"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2007년 11월 신사임당(1504∼1551)이 5만원권 화폐인물로 선정되자 여성계가 반발했다. 가부장 사회가 만들어낸 전형적 '현모양처' 여성상이라는 이유에서다. 신사임당은 이렇게 율곡 이이(1536∼1584)라는 걸출한 유학자를 낳아 기른 어머니의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오는 10월 방송 예정인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나 소설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에서는 뛰어난 예술가로서 면모가 부각되며 신사임당을 재조명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렇다면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는 언제부터 한국인의 머릿속에 각인됐을까. 혹시 시대적 상황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현모양처 모델을 필요로 해 그가 불려 나온 것은 아닐까.

계간 '사학연구' 여름호에 실린 홍양희 한양대 교수의 논문 ''현모양처'의 상징, 신사임당: 식민지시기 신사임당의 재현과 젠더 정치학'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홍 교수는 식민지 조선의 문헌과 연극 등에 나타난 신사임당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본 결과 40년이라는 짧은 기간 세 가지 이미지가 차례로 등장했다고 파악한다.

식민지 초기 '자녀를 잘 가르친 교육받은 여성' 이미지는 1930년대 들어 신여성에 대비되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변화한다. 일본이 근대 여성교육의 목표로 개발해 조선에 유입된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신사임당에 덧씌워진 것은 이때부터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총공세를 펼친 식민지 말기에는 '군국의 어머니'이자 후방에서 지원하는 '총후(銃後) 부인'으로 전쟁에 동원됐다는 게 홍 교수의 분석이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 후기 회자되던 신사임당의 '모범적 어머니상'은 20세기초 국가적 위기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다. 당시 민족주의 담론은 근대적 여성교육을 강조했다. 부국강병을 이끌 미래의 국민을 양성할 어머니, '질적으로 우수한 어머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장지연이 1908년에 쓴 여성용 교과서 '여자독본'을 보면 신사임당은 자식을 훌륭한 인물로 키워낸 어머니, 재주와 덕행을 갖추고 가정교육을 잘한 어머니로 소개된다.

이때만 해도 신사임당이 곧 현모양처는 아니었다. 현모양처는 근대 산업사회 이후 서구에서 확립된 성별 역할분담의 영향으로 일본이 만들어낸 여성상이다.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여성'을 의미했기 때문에 신사임당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보다는 오히려 예술인으로 주목받았다. 1925년 잡지 '개벽'은 신사임당을 조선 13대 화가 중 한 명으로 소개했다.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는 1930년대 신여성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널리 퍼졌다. 신여성을 '외래식 화장'과 '양(洋) 머리'를 하고 다니는 '모던 병자' 취급하는 가운데 전통적 여성상의 대표주자로 신사임당이 떠오른 것이다. 이와 함께 현모양처는 문명화·계몽된 여성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동양적·전통적 여성의 상징으로 지금과 유사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흥미롭게도 기존의 '현모'에 더해 '양처'로서 신사임당의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데 남편 이원수가 '희생'된다. 당시 여성잡지 '신가정' 등에서 이원수는 "학문이 부족함으로 모든 일에 망매(茫昧)"하거나 "학문이 천박하고 하는 일에 실수가 많음으로" 신사임당의 가르침과 내조가 필요한 모자라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신사임당 '초충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1940년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다시 변신한다. 전쟁 중인 국가에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는 '군국의 어머니'이자 '총후 부인'의 표상이 됐다.

조선인을 전쟁터로 끌어내기 위해 춘원 이광수가 야담가 신정언과 함께 꾸린 '야담만담부대'의 1943년 순회공연에서 이런 이미지가 뚜렷이 드러난다. 당시 일간지 기사를 보면 신정언은 "신사임당과 같은 따님을 나시여 군국의 어머니로서 받치고…아들을 나시여 황국의 방패로 바치시기를 축(祝)하는 바입니다"라며 징병제를 소개한다.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조선총독은 "조선 부인은 모름지기 이율곡 선생의 어머님의 본을 뜨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부국강병과 독립을 염원하던 민족주의 진영, 모더니즘에 반발한 전통주의자들, 마지막으로 태평양전쟁 총력전 체제로 전환한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라 변화한 셈이다.

홍 교수는 "신사임당은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따라 그 이미지를 다양하게 구사했다"며 "신사임당 담론은 '신여성' 담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여성들에게 현모양처라는 젠더 역할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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