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거짓말 할 줄 모르잖아요'의 속뜻은

입력 2016. 8. 26. 19:16 수정 2016. 8. 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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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13) 외교관과 거짓말

외교관은 실제로 거짓말을 할까? 거짓말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할까? 사람들이 이런 궁금증을 갖는 것은 지금부터 400년쯤 전에 유럽의 어느 외교관이 ‘대사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외국에 거짓말을 하도록 파견된 성실한 인간이다’라고 내뱉은 한마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외교관이라고 하면 국제 무대에서 권모술수를 구사하면서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고 다니는 인간들인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는 외교협상에서 한국이 상대국에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나 나의 상사가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옆에서 본 적도 없다. 그럼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몇 번 있다’이다.

2004년 말에 한국이 일본의 김 수입 쿼터 제도를 부당한 수입규제라고 하여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그때까지 40년 가까이 한국으로부터의 김 수입 물량을 240만속(1속은 100장) 수준으로 묶어두고 있었다. 매년 일본 정부에 대해 쿼터 물량을 늘려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통하지 않아서 결국 세계무역기구 제소라는 강경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승소해서 김 수입 쿼터 제도를 철폐시키면 물량에 제한을 받지 않고 일본에 김을 수출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한국은 현실적인 대안도 함께 제시했다. 수입 쿼터를 10년간 단계적으로 1500만속까지 늘리기로 약속한다면 언제라도 제소를 취하할 수 있다는 타협안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뒤 일본 쪽 담당자가 통상교섭본부에서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한 까닭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1500만속이라는 타협안을 다시 한 번 설명하자 상대방은 ‘그런 좋은 제안이 있었느냐?’면서 마치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몇 달 전의 공식회의 자리에서 한국 쪽이 타협안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니 정말 황당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전문보고를 다시 확인해 봤더니 도쿄의 한국대사관에서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 자세히 설명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도쿄로 전화를 걸어 재차 확인도 했다. 이렇듯 분명히 전달받은 말까지도 들은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상황에서 협상이 제대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일본은 왜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했을까?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그렇지 않아도 김 수입 쿼터 제도가 자유무역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부담스럽던 상황에서 한국의 제소를 핑계 삼아 그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국내의 김 생산업자들에게 한국이 세계무역기구에서 결판을 내자고 고집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해야 하는데, 만일 1500만속의 타협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한 처지가 될 터였다. 이런 이유로 국내적으로 이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고 한국을 상대로도 의도적으로 들은 적이 없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상대방의 행동에 이해가 가는 면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안면몰수하고 딱 잡아떼는 데 대해서는 적지 않게 분개했던 것도 사실이다.

2001년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일본 정계에서 이단아와도 같은 존재였다. 우선 장발의 헤어스타일부터 보통의 정치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고, 저녁에는 요정에서 술을 마시며 인맥을 쌓고 정치적 거래를 하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에도 일찍 집에 들어가 혼자서 와인을 마시며 오페라를 듣는 것이 취미였다. 자민당의 파벌정치가 한창이던 시절에 정치에 입문해서 후쿠다파에 몸담고 있기는 했지만, 엄격한 선후배 관계 속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고독하게 자기 개성을 지키는 독불장군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가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정치에서는 커다란 이변이었는데, 게다가 5년 반이나 장기 집권하면서 1945년 이후 3번째로 장수한 총리까지 되었으니 엄청난 시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고이즈미는 국내적으로는 ‘대통령적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장악력을 발휘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매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바람에 한국·중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이즈미의 한국 방문 계획이 잡혀서 양국 외교부가 그 준비에 착수했고, 당연히 초점은 그가 한국에서 과거 역사에 대해 어떠한 내용으로 발언할 것인지에 맞춰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의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나는 양국 외교부의 담당 간부가 만나서 저녁 식사를 겸해 업무협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국 쪽은 일본 외무성이 일전에 제시했던 총리의 과거사 관련 발언 내용을 재차 확인하려 했는데, 일본 쪽은 그때 제시했던 내용은 어디까지나 외무성이 실무적으로 준비하는 초안일 뿐이며 실제 발언 내용은 총리가 직접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알 수 없다고 했다.

세계무역기구 제소 분쟁 당시
일, ‘한국쪽 제안 몰랐다’ 잡아떼
자국 여론 설득 위한 거짓 제스처
개성 강한 고이즈미 총리 시절엔
과거사 메시지 조율 말 뒤집기도

국가간 이해 충돌하는 외교현장
거짓말 여부 가리기 어려울 수도
이기는 게 우선인 재판정과 달리
외교관은 계속 얼굴 맞대는 사이
현명한 선택은 적절한 균형 찾기

재판과 외교는 다르다

한국 쪽이 지난번과는 이야기가 다르지 않으냐며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자, 일본 외무성 간부는 ‘지난번에도 지금과 똑같은 의미로 이야기한 것인데, 만일 한국 측이 다르게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설명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답했다. 말하는 내용이 논리적인데다 그 태도가 매우 진지하고 정중했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던 나에게는 뭔가 한국 쪽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전후 사정을 잘 아는 선배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분명히 일본 쪽이 지난번에는 총리가 실제로 그렇게 발언할 것이라는 전제로 설명을 했었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꿨다고 했다.

의원내각제의 일본은 전통적으로 관료집단의 힘이 굉장히 강하다. 특히 외교 문제에서 총리나 외상이 발언하는 내용은 외무성의 관료들이 작성해준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달랐다. 관료들의 신중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집한 사실에서도 보듯이 자기 의견이 강했다. 외교행사에서도 외무성이 써준 원고는 어디까지나 참고자료일 뿐이고 실제 발언 내용은 총리인 자기가 직접 결정한다는 식이었다. 아마도 애초에는 일본 외무성이 자기들이 만든 발언 원고를 총리실이 그대로 수용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한국 쪽과 협의를 했는데, 나중에 총리실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쪽에 사정을 다시 설명하기가 난처해진 것이다.

외무성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총리실에 올리면 그대로 통과되는 게 관례라서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한국 측도 잘 알다시피 고이즈미 총리의 개성이 워낙 강해서 그대로 되지 않은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하면 훨씬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총리실 핑계를 대는 대신에 자기 자신의 설명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설사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런 종류라면 조금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외교 현장에서 정확하게 무엇이 거짓말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분명히 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든지 지난번과는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이 보기에는 그것을 거짓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거짓말인지 아닌지 애매해진다.

냉전시대에 소련은 핵무기를 선제사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대외적으로 선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에 발굴된 문서에 따르면 그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비밀리에 핵무기의 선제사용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소련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미국이 냉전시대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수용하지 않고 있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어느 나라가 핵무기의 선제사용 포기 방침을 선언하더라도 그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소련의 입장에서는 경쟁국인 미국이 선제사용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선제사용의 가능성까지 제거해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련이 선제사용 가능 상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보험용일 뿐이고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라는 방침 자체는 확고했다고 한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거짓말이라는 의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단 한 번뿐인 협상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일 것이다. 거짓말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상대 국가가 곧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좋든 싫든 상대국과의 외교관계는 오래도록 계속될 수밖에 없다. 처음 한두 번은 거짓말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외교협상을 꾸준히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짓말은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현명한 협상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원고와 피고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재판과 국가 간에 벌어지는 외교협상이 서로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재판에서는 판결이 나온 뒤에 상대방을 법정에서 다시 볼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봐야 한다는 심리가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앞으로도 다른 사건에서 계속 마주해야 한다면 전략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궁지에 몰아넣어서 원한을 남기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볼 때 서로 손해가 되지 않도록 적절한 수준에서 이해관계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평판으로 먹고사는 곳

게다가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만 외교관의 세계는 특히 평판으로 먹고사는 곳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된다. 외교부의 동료들로부터 인물평을 들어보면 대개 그 사람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 수 있다. 해외공관에 근무하는 후배로부터 그곳에 새로 부임해 온 어느 나라 외교관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몇 년 전에 서울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나 해서 이름을 물었더니 과거에 서울에서 나의 업무 상대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내가 후배에게 그 외교관의 성격이나 취미, 함께 일하면서 느꼈던 장단점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그 후배는 내색은 안 하겠지만 내게서 들은 인물평을 염두에 두고 그 사람을 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남으로부터 전해 듣는 평판이 중요한 구실을 하는 외교관의 세계에서 거짓말은 그리 쉽게 써먹을 수 있는 협상 수단은 아니다.

친하게 지내는 외국 학자와 여러 나라의 외교 스타일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사람이 ‘한국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잖아요’라며 웃었다. 분명히 내 경험으로 한국이 외교협상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는 것과 감추어둔 전략이나 전술도 없이 그저 솔직하기만 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외국 학자의 그때 그 말은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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