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뻐야 손이 가요, 사회과학 서적도
직장인 이경신(가명·26)씨는 최근 온라인 서점에서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그린비)를 구입했다. 부제인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백화점이 상징하는 '소비의 즐거움' 이면에 젊은 여성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숨겨져 있음을 고발한 책이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실제 백화점 직원 12명을 인터뷰해 쓴 일종의 노동 관련 보고서지만, 가벼운 분위기의 삽화와 도표가 곳곳에 들어가 무거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책을 편집한 김미선씨는 "백화점 직원을 무릎 꿇게 해 사과를 받아내는 손님의 '갑(甲)질' 등 무거운 주제가 나오다 보니 자칫 독자들이 외면할까 우려했다"며 "책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내용을 요약한 가벼운 터치의 그림과 도표를 많이 넣었다"고 말했다.
딱딱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코믹한 삽화와 내용을 잘 간추린 도표를 넣어 분위기를 바꾸는 책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 시집이나 감성에세이 등에 주로 들어갔던 삽화를 이제는 인문·사회과학 도서에서도 종종 볼 수 있게 된 것. 최근 나온 페미니즘 관련 서적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봄알람)이나 응급의학과 의사가 응급실에서 직접 경험한 죽음과 삶에 대한 기록을 담은 '만약은 없다'(문학동네) 등에도 어김없이 삽화가 주요하게 들어가 있다.
삽화가 부쩍 많아진 것은 최근 출판에서 모바일 유통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여기에는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용 '카드뉴스'를 많이 돌려 보는 트렌드도 반영됐다. 인터넷서점 예스24의 김도훈 인문담당 MD(구매담당)는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심리학 서적이나 철학서 등도 책에서 이미지의 비중을 늘리고 이를 활용해 카드뉴스 같은 것을 만들어 SNS(소셜미디어) 홍보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일단 그림이 예뻐야 인터넷에서 '공유'가 잘 된다"고 했다.
원조는 지난 5월에 출간된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오우아)라고 할 수 있다. 잦은 초과 근무, 장시간 회의, 수당 미지급 등 직장의 현실을 고발한 비판서를 번역 출간하면서 출판사는 일본 원서에 있지도 않았던 일러스트를 그려 넣어 화제가 됐다. 딱딱한 책 내용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자, 퇴근이 다가왔으니 즐겁게 회의 시작합시다!" "38도는 미열, 회사를 쉬는 건 40도부터!" 등 직장 현실을 풍자한 기발한 대사가 들어간 그림에 먼저 열광했다. 발매와 동시에 책에 들어간 그림들이 페이스북 등으로 퍼 날라지면서 소문을 탔다.
삽화의 비중은 책의 '타깃 독자층'이 젊을수록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긴 글보다 이미지에 더 빨리 반응하는 젊은 독자들을 잡기 위한 전략이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 세대의 주택문제를 다룬 '내가 살 집은 어디에 있을까'(후마니타스), 20~3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한 '낼모레 서른, 드라마는 없다-방황하는 청춘을 위한 찌질하지만 효과적인 솔루션'(소담출판사) 등의 책에서도 그림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삽화는 책 편집의 오랜 기법 중 하나지만, 갑자기 이 책 저 책 비중이 늘어나다 보니 책 내용이 부실해질 우려는 없을까.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최근 삽화가 많아지는 것은 일종의 '과잉 디자인'일 수 있지만, 이미지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된 소셜미디어 시대에 맞춰 책도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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