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평화의 소녀상 조각가 김서경·김운성 부부

글 원희복 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gnhyamg.com 기자 2016. 8. 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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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쟁을 기념하는 ‘아수라’ 세상-평화·통일을 조각한다
조각 하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이 조각은 원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 앞에서 고뇌하는 한 시인의 모습이다. 이 로뎅의 조각품에 대해서는 다양한 철학적 평론과 해석이 있지만 기자가 볼 때는 매우 단순하다. 쭈그리고 바닥을 보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왜냐고? 만약 그가 좋은 시(글)를 썼다면 애당초 지옥에 오지 않고 천국에 갔을 것이며, 좋은 시를 썼는데도 지옥에 왔다면 억울해 하거나 항의했을 것이다. 당연히 로뎅은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든 모습을 조각했을 것이다. 누구도 유추할 수 있는 간단한 이치 아닐까.
민족 자존심 걸린 외교 상징이 된 소녀상
이에 비해 ‘평화의 소녀상’은 훨씬 의미가 깊다. 빈 의자를 옆에 두고 앉은 소녀의 모습이 시사하는 것은 복합적이다.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인연을, 왼쪽 어깨에 앉은 새는 하늘과 교감하는 영매다. 뒤꿈치를 내리지 못한 발은 늘 불안했던 소녀의 힘든 삶이다. 소녀상에는 이런 함축적 상징이 12개나 된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는 이 소녀상에 대해 “소녀상은 성 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204쪽)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205쪽) “소녀상은 ‘그 때의 조선인 위안부’라기보다는 ‘20여년의 데모’와 운동가가 된 위안부이다”라고 말했다.

박유하가 예술작품에 자신만의 느낌을 갖는 것은 자유다. 이에 김서경은 “그러면 소녀상을 매춘부 이미지로 만들라는 것인가”라며 “피해자 마음에서 소녀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유하의 소녀상 느낌에 기자는 “강자를 옹호하는 것은 ‘아부’이고, 약자를 비난하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소녀상에 대해 180도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작품이 복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소녀상은 단순한 청동 금속의 존재를 뛰어넘었다. 추울까봐 목도리를 둘러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준다. 이렇게 인간적 정서를 동일시하는 조각품이 또 있을까. 과문하지만 벌거벗은 로뎅의 조각품이 추워보여 옷을 입혀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박유하는 이런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에 뭘 느낄까.

최근 김서경·김윤성 부부가 출간한 「빈 의자에 새긴 약속」

이제 소녀상은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외교적 상징이 됐다. 정부 차원에서 ‘철거하기로 약속됐다’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는 외교적 논란을 일으키면서 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한겨울 같이 노숙했다. 게다가 소녀상은 시간이 갈수록 세우려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국민의 자발적 성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평화의 소녀상 조각가 김서경·김운성 부부를 만났다. 7월 22일부터 3일간 서울 시청앞에서 열었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라는 전시회가 너무 좋아 인사동에서 연장 실내 전시가 마련된 것이다. 부부는 주한미군이 사격장으로 쓴 경기도 매향리에서 구해 온 포탄과 탄피에 철골을 붙이고, 꽃을 새겨 평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물론 이 전시 외에도 그의 상징작 평화의 소녀상도 전시하고 있다.

여리지만 당당하고 순수한 소녀 표현
위안부 문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2011년 12월 14일 세운 첫 ‘평화의 소녀상’ 이후 소녀상은 전국, 전 세계로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부부는 매우 바쁘다. 전시도 많지만 소녀상 제막식이 지방과 해외에서도 열리기 때문이다. 부부를 한 곳에 모아 얘기를 듣는 것도 빠듯했다.

“지금까지(8월 12일) 우리나라에 29점을 세웠고, 해외에도 4점이 있다. 제막식까지 마친 것만 그렇다. 그런데 요청이 들어오는 곳도 많고 또 당장 내일 제막식 하는 것도 있다.”

원래 비석 형태에서 시작한 디자인은 일본 정부의 반대에 분노, 할머니 형상으로 바뀌었다. 김서경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처참한 상처를 받았던 당시 나이대의 소녀상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서경은 원래 소녀상을 제작하기 전 ‘소녀의 꿈’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꿈 많은 소녀가 봄의 향기를 맡으며 예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착안해 할머니들이 끌려가기 전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소녀상의 바탕이 된 흙 붙임 작업은 김서경 혼자했다. 위안부 할머니의 소녀상에 남자 손이 닿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처음 만든 소녀상 미니어처(모형)를 보면 매우 토속적이고, 또 소박한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 만들어진 소녀상은 조금 세련된 미인이다.

“하하. 그런가? 토속적으로 만들었는데. 소녀상 얼굴은 소박한 조선의 소녀여야 하고, 또 얼굴이 밉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소녀상에서 잘린 머리카락, 새, 빈 의자 등 12가지 강조 포인트가 있다. 그 중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어디인가.

“역시 소녀의 얼굴 표정이다. 제일 신경 쓴 것은 어리지만 어리지 않게, 여리지만 당당한 의지를 표현하고, 순수한 소녀지만 살아온 역사와 미래를 보이는 그런 얼굴을 나타내려 했다. 얼굴만 백 번 정도 고쳤다.”

김서경(1965년 서울생) 김운성(1964년 춘천생) 부부는 대학(중앙대학교 예술대학 84학번)에서 만났다. 남편 김운성은 예술대 총학생회장이었고, 부인 김서경은 본인 말대로 ‘회장 밑에서 열심히 도와주던 사람’이었다. 사실 공과대학이나 예술대 학생들은 시국문제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김운성은 “우리 예술대학은 사진과·문예창작과도 그랬지만 풍토가 달랐다”면서 “우리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남들이 비켜가는 것에 대해 우리까지 비켜서지 말자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암울했던 1980년대 민주·통일을 형상화하는 민중미술운동을 같이 했다. 두 사람은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 전시에 같이 출품하는 등 꾸준히 작품을 이어오고 있다.

결혼한 두 사람은 3년간 미술학원을 운영했지만 ‘추구했던 가치가 맞질 않아’ 그만두고 작품 작업에만 몰두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지만 작품활동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렵다. 김운성은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래도 전시를 하면 아내 작품이 많이 팔렸다”고 말했다. 김서경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 궁핍함은 느끼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없어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화와 달리 조각은 브론즈 등 재료 값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브론즈가 비싸, 플라스틱으로 먼저 만들어 작품이 팔리면 브론즈로 다시 만들어 전달한다, 돈을 아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귀띔한다. 아직 형편이 안 돼 작품과 도구를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 비닐하우스를 작업실로 쓰고 있다. 소녀상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최근 함께 작업하는 ‘베트남 피에타’ 열중
두 사람은 동학 100주년 무명 농민군 추모비(1994년), 민족시인 채광석 시비 조형물(2000년), 미선·효선 추모비(2012년),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기념비(2014년) 등 정치·사회·역사적으로 ‘의식화’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에 만든 ‘전차와 지각생’(2010)과 같이 서민의 토속적 삶도 형상화하기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각자 작품도 하고, 공동 작품도 한다. 남편 김운성이 개구쟁이, 말뚝박기 등 토속적 한국미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부인 김서경이 더 사회참여적이라는 느낌이다. 김서경의 대학 졸업 작품이 ‘통일이 오면’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에서는 포탄과 탄피로 평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서로의 예술적 감각은 어떻게 평가하나.

김서경- “남편은 은유적 방법을 많이 쓰고, 나는 직설적인 표현을 많이 쓴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 사람의 표정과 삶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남편은 그런 얘기를 한 번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을 한다.”

그런가. 오히려 남녀의 스타일이 뒤바뀐 것 같다.

김운성- “그건 철학의 차이일 뿐이다.(허허)”

김서경·김운성 부부는 최근 소녀상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책 <빈 의자에 새긴 약속>(도서출판 말)을 펴냈다. ‘평화의 소녀상 작가 노트’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소녀상을 제작한 계기에서부터 제작과정, 건립 일화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서경이 직접 단 책 제목에서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의미한다. 김서경은 이 빈 자리를 “할머니가 앉았던 곳,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빈 자리, 우리 아이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앉아야 할 약속의 자리”라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예술과학연구소장)는 이 책에서 “평화의 소녀상은 사회적 소통과정을 거쳐 예술적 소통을 매개하는 점에서 사회예술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면서 “과거사 문제의 의제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요즘 ‘베트남 피에타’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학살된 베트남 피해자를 위로하는 상징물로, 어머니가 죽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4월 한베평화재단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노화욱)가 만들어져 올해 안에 한국과 베트남에 ‘베트남 피에타’를 동시에 세우기로 했다. 월남전 참전단체에서 반대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제주 강정마을에 세우기로 했다. 베트남에서는 우리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에 대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주제는 계속 가져가야 할 것 같다”면서 “그래도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전쟁을 기념하는 아수라 같은 여건이지만, 통일에 대한 상징물만큼은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 원희복 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gnhyamg.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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