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덕혜옹주, 독립운동은 허구..정략결혼한 뒤 조현병은 사실

배영대 2016. 8. 1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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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때 생모 타계 뒤 불면증 겪어19세에 대마도 번주 아들과 결혼30대부터 대부분 병원서 지내'영친왕 망명 작전' 역사에 없는 일사실+허구 팩션의 힘 300만 돌파
정략결혼 후 20대 때의 덕혜옹주. [중앙포토]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1912∼1989)는 불과 27년 전까지 만해도 우리 곁에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던 그녀의 삶이 요즘 화제다. 1912년 5월 12일 덕수궁에서 대한제국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貴人梁氏) 사이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고종이 1907년 강제 퇴위당한데 이어 1910년 제국주의 일본이 드디어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직후다. 그 무렵은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 외동딸을 고종은 무척 아꼈다. 고종의 갑작스런 타계(1919년 1월 21일) 이후 그녀의 삶은 일본에 의해 ‘정략적 양육’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21년 9살 때 당시 한성(서울)에 있던 일본인 고위층 자녀들이 다니는 히노데소학교에 2학년생으로 입학해 4년간 다녔다. 이어 13살이던 1925년 일본으로 가서 도쿄의 여자학습원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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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때인 1929년 5월 생모 양 귀인 마저 타계하는데, 그 이듬해부터 신경쇠약 징후를 보였다고 한다. 여자학습원을 졸업한 직후인 1931년 5월 옛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 이듬해 외동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다. 출산 이후 조현병 증상이 악화돼, 1946년 도쿄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했다가 1955년 이혼했다는 것이 그녀 삶의 큰 줄거리다.

덕혜옹주를 최근 다시 소환한 건 그녀의 이름을 딴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감독)다. ‘광복절 마케팅’이 제법 성공한 모양새다. 현재 300만 명 넘게 봤는데, 역사 영화는 팩션이란 점을 놓쳐선 안 된다. 팩션이란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을 합성한 말이다.

재미를 위해 극적 요소가 추가되는데 이 영화에선 ‘황실의 독립운동’이다. 영화 중후반 기둥 줄거리로 나서는 ‘영친왕 망명 작전’을 보면, 마치 황실의 후예들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인 것 같다. 영화 도입부에 “일부 내용은 픽션”이라는 문구를 넣었다고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을 도우며 영친왕을 중국 상해로 망명시키는 일에 가담한다는 스토리는 허구다.
영화 ‘덕혜옹주’에서 옹주역을 맡은 배우 손예진.
덕혜옹주는 1946년부터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으나 바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7년간 요양을 해야했다. 1968년 이후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 살다가 77세를 일기로 타계하는데 생애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낸 셈이다.

그녀의 비극적 삶을 복원해낸 이는 일본인 혼마 야스코(本馬 恭子)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갓스이 여대 교수를 지낸 혼마는 1998년 일본에서 덕혜옹주 평전 『도쿠케이 히메(德惠姬)』를 펴냈다. 한국에선 2008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이훈 옮김·역사공간)로 번역됐다.

덕혜옹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나는 비전하(생모 복녕당 양씨)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구씨(영친왕의 아들)가 보고싶어요”. 비극적 삶이 느껴진다.
덕혜옹주의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서울·도쿄·대마도를 오가며 취재하고 자료를 모아 풀어낸 혼마 덕분이다.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시인·화가·대학교수로 활동한 소 다케유키를 재평가 하는 등 일본인의 관점이 녹아 있지만, 덕혜옹주의 삶을 통해 일본이 한민족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말살해갔는지를 밝혀내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허진호 감독은 이 책 이후에 나온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2009년·다산책방)만을 영화 도입부에 자막으로 언급했다. 2010년 표절 논란이 일었던 소설이다.

혼마의 조사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18세 때부터 불면증을 겪다가 조발성치매 진단(1930년 5월)을 받았고, 증상이 약간 진정되자 혼담이 나오기 시작해 그해 11월 소 다케유키와 선을 보았다고 한다.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외동딸은 메이지대학을 나와 스즈키란 성의 남성과 1955년 결혼했으나 다음해 8월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붕괴시키고 우리 민족의 기를 꺾었다. 고종 황제를 ‘이태왕(李太王)’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李王)’으로 격하했고, 이왕직(李王職)이란 기구를 만들어 황실을 관리했다. 황실의 부활을 막기 위해 후예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고종과 순비 엄씨(淳妃嚴氏) 소생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는데,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영친왕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일본 여인 마사코(方子)와 결혼시켰다. 그는 일본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덕혜옹주’는 망국 황실 후예들의 서글픈 이야기다. 황실이 이 정도면 일반인은 어땠을까. 덕혜옹주 역을 맡은 배우 손예진이 미쳐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장면은, 20세기를 제정신 갖고 살아내기 힘들었던 우리 민족의 혼란상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러나 허구와 팩트를 구분해야 한다. 지난해 광복절 즈음 흥행한 ‘암살’에 이어, 역사영화에 대한 바른 보기가 필요하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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