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구제금융 대가로 태어난 도산법..기업회생 백기사로 '주목'

이현정 2016. 8. 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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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내 도산법 만들라" 1997년 IMF 요구로 개정안 긴급 마련2000년 국내 법관들 선진 도산제도 배우려 줄줄이 美연수기업생사 좌우 자리매김..법정관리 20년 심포지엄 준비중'도산법 산파' 김재형 서울대 교수, 대법관 후보 임명 제청

◆ 레이더L / 통합도산법 탄생 비화 ◆

한국 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 때만큼이나 위태롭다고들 한다. 위기는 법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경제를 떠받치던 조선·철강·해운업 등의 위기로 STX조선해양 등 굵직한 기업들이 회생절차(법정관리)를 위해 법원을 찾고 있다. 법정관리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일부 비판에도 연간 15만명, 1500개 기업이 이용하는 제도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내건 구제금융의 조건이기도 했다. 감당 불가능한 빚을 탕감하고 새 출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처방이라는 것이다. 32회째를 맞는 레이더L은 개인회생과 기업 부활의 기틀을 마련한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일명 통합도산법)' 시행 10년을 맞아 IMF 외환위기 이후 법조계 움직임을 취재했다. 지난 6월 22일 김재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51·사법연수원 18기)에게서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들은 것이 실마리가 됐다. 김 교수는 IMF 요구에 따라 도산 3법(회사정리법·화의법·파산법) 개정과 통합도산법 제정 작업을 맡았던 도산 분야 전문가다. 공교롭게도 인터뷰 이후 김 교수는 대법관 후보자에 임명 제청됐다. 현재 대법원 대법관 중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68·2기)과 고영한 대법관(61·11기)이 각각 초대, 5대 서울중앙지법 파산수석부장판사를 지낸 이 분야 전문가다.

IMF 구제금융 체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98년 1월 16일. 김재형 당시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꼬박 밤을 새운 채 이른 아침을 맞았다.

며칠째 이어진 강행군에 최상목 재정경제원 서기관(53·현 기획재정부 1차관)을 비롯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과 변호사 등은 모두 푸석한 얼굴이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현행법과 개정안, 개정 이유를 비교한 A4 용지 약 100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검토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10여 일 만에 도산 3법 개정안을 완성한 순간이다. 이는 이후 통합도산법의 토대가 됐다. IMF 요구대로 미국식 '프레시 스타트(Fresh start·새 출발)'가 가능해지면서 한국 사회는 변화를 맞았다.

◆ 도산법 개정안, DJ 대통령 취임 전날 시행

김 교수가 최 서기관에게서 전화를 받은 것은 그해 1월 1일 연휴가 끝나가던 주말이었다. 당시 재경원은 예산·국고·세제 등 국가 재정 부문을 담당하는 중앙부처로 IMF 외환위기에 대처하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최 서기관은 법정관리 전담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 판사를 끝으로 학계로 간 김 교수에게 "20일 안에 통합도산법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IMF 요구였다. IMF는 외환위기가 닥친 한국 정부에 구제금융을 대가로 "3개월 안에 통합도산법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부실기업을 정리하라는 게 요지였다. 김 교수는 "검토해야 할 조문만 700개에 달해 법 제정은 불가능하고 대신 기존 도산 3법을 개정하자"며 "IMF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이튿날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경원장(72)이 고민 끝에 이를 수용했다.

IMF가 정한 시한까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려면 사실상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 전까지 모든 절차를 마쳐야 했다. 재경원과 법무부에는 도산법 관련 자료가 부실했다.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에 김 교수가 갖고 있던 것을 더해 작업을 시작했다. 법원 행정처도 급하게 판사들로부터 개정시안을 모아서 보냈다. 김 교수는 "당시 도산 절차를 신청한 기업이나 정치권 인사 등이 몇몇 개정안을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며 "개정안을 유지해야 하는 상세한 이유를 작성해서 보내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말했다.

개정안은 법무부 산하 개정위원회,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회 본회의를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국무회의가 이례적으로 토요일에 열리기도 했다. 가까스로 개정된 법은 대통령 취임 전날인 2월 24일부터 곧바로 시행됐다.

◆ "면책에 대한 인식 바꾸는 계기"

IMF가 내건 또 다른 조건은 구제금융의 일정액을 국내 도산 전문가를 양성하고 해외 선진 제도를 도입하는 데 쓰라는 것이었다. 2000년 세계은행(IBRD) '기술지원차관(TAL·Technical Assistance Loan)'으로 판·검사 10여 명이 미국의 도산제도를 배우기 위해 연수를 떠났다. 이들은 미국 조지워싱턴대 컬럼비아대 뉴욕대 등 유수 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신분으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간 머물며 연방파산법원과 현지 로펌 등을 경험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 도산제도에 기여했다. 김형두 사법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51·19기)과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50·21기)는 각각 통합도산법과 개인채무자회생법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김현석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50·20기)은 미국의 파산법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워런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상원의원)가 쓴 '미국 기업 파산법'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다.

당시 TAL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서 부장판사는 "신용카드를 만들고자 관용여권을 챙겨서 미국 현지 은행을 찾았다가 '아직 신용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대신 체크카드를 발급받아 황당했다"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국은 누구나 빚을 갚지 못하면 파산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금융기관이 거래에 깐깐해짐으로써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중학교 과정에서 개인파산제도를 다루는 등 누구든 도산 절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며 "면책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 통합도산법 남은 과제는

도산법 전문가들은 오는 10월 법정관리 역사 20년을 기념하는 대형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통합도산법이 시행된 지 1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비록 IMF 요구로 시작했지만 흩어져 있던 법을 한데 모아 통합된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이용률이 크게 느는 등 국내 도산 절차가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다. 1990년대 후반 한보, 진로, 기아, 쌍방울 등 대기업이 줄줄이 수술대에 올랐을 때 법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판사들에게 기업의 생사를 어떻게 믿고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도산사건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법원은 안팎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전문성을 강화해 나갔다. 외환위기 당시 유보됐던 파산법원 설치도 논의되고 있다.

도산업무를 맡았던 전·현직 법관들은 "법정관리 역사는 인식이 전환되는 과정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남은 과제 또한 마찬가지다. 도산제도의 목적은 누구에게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 만큼 지금보다 폭넓은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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